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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이버링 Oct 03. 2022

아빠의 여동생

내 가족의 가족


해 질 무렵, 차창밖으로 보이는 시골의 풍경이 자욱하다. 엄마는 진도에 온 김에 해남 고모댁에 들러 고모가 직접 기른 고구마를 잔뜩 챙겨갈 심산이다. 엄마는 일 년에 몇 번이고 해남에 간다. 튼튼한 크라프트 포대에 가득 담긴 고구마들의 고향 해남. 운전하는 아빠와 옆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렇게나 중얼이는 엄마, 그리고 뒷좌석에서 내 무릎을 베고 잠든 딸아이와 해남으로 향했다.


해남 고모댁은 낯설다. 잠깐 든 잠에서 깼을 때 이미 고모댁 마당에 아빠가 주차를 한 뒤였고 나는 토끼눈을 비비며 차에서 내려 고모댁 창고로 향했다. 고모집 현관문에서 10m도 안 되는 거리에 각종 농기계가 쌓여있는 창고는 천장이 높고 마치 공장처럼 부산했다. 그곳에 체구가 작고 허리는 굽었으며 기다랗고 검은 장화를 신은 고모가 서있었다. 고모 옆에는 손바닥만 한 고구마들이 무릎 높이까지 쌓여있었다. 고모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부군수 며느리여?"

라며 가볍게 웃으며 인사했다. 시아버님이 잠시 해남 부군수로 계셨단 사실이 고모에게는 더 친근하게 느껴진 모양이다. 함께한 추억이 별로 없는 고모한테 나는 '친오빠의 막내딸'쯤인 것 같았다. 고모의 오빠는 챙겨 온 과자들을 트렁크에서 빼내어 고구마 옆에 있는 포대위에 올려놨다. '이런 거 안묵은디..' 중얼이셨지만, 나중에는 새참으로 상자를 뜯고 맛있게 드실 고모의 움직임을 상상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당뇨와 같은 건강문제가 있지 않고서는 연세가 있는 아줌마, 할머니들은 모두 과자를 좋아한다. 

 내 눈앞 고모의 움직임은 비디오로 치자면 1.5배속이었다. 내가 옆에서 도우려 해도 저 속도를 방해할 것만 같아 엉거주춤 서 있었다. '해남황토고구마'가 커다랗게 쓰인 두툼한 박스에 먼지를 털어 말끔한 고구마를 한 번에 서너 개씩 주워 담고 노련한 손놀림으로 상자 뚜껑을 접어 유리테이프를 붙인다. 절대로 뜯어지지 않을 만큼 야무지게 포장한 박스들은 조만간 택배 트럭에 실려 누군가의 집 앞에 도착할 것이다.


엄마는 몇 개의 상자 앞에 섰다. 지인에게 갈 고구마 다섯 상자인 모양이다. 아직 테이프를 붙이지 않은 박스에 엄마는 아이의 허벅지만 한 고구마를 두어 개 더 얹는다. 그걸 본 고모는 또다시 1.5배속으로 움직여

"무게가 더 나가면 안된당께~"

라고 탄식하며 엄마가 얹어 넣은 고구마는 그대로 두고 앞서 넣은 자잘한 고구마 몇 개를 빼냈다. 엄마가 얹은 무겁고 커다란 고구마 탓에 작은 고구마들이 빠져나간 자리로 박스는 듬성듬성 빈자리가 보였다.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 무심하게 뚜껑을 덮어 유리테이프로 단단히 붙이는 고모 옆에 서서 나는 '그냥 두시지는...' 하고 개미소리로 중얼거렸다. 내심 걱정이 되었다. '저걸 뜯어본 사람은 좀 당황하겠는데? 지인을 통해 구입한 고구마라면 한 개라도 더 있어 보여야 기분이 좋을 텐데, 혹여 엄마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엄마의 소개로 한 상자에 3만 원씩, 15만 원을 벌게 될 고모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고맙다는 말이라던지, 언니 봐서 내가 몇 개 더 넣었네라던지 하는 인사치레도 없었다. 고모에게는 고구마를 포장해 택배로 보내는 일은 물 한 컵 마시는 일보다 시시하게 느껴졌다. 고구마를 발송한 기록을 전산시스템에 저장할 리도 없었고, 장부에 기록해서 적는 것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오직 기억에 의존하여 당연히 고구마값을 송금하겠지,라고 철저히 믿고 있는 듯했다.


아직도 수북이 쌓인 고구마들을 이번에는 2배속으로 비료포대에 담는다. 비료포대는 세워두면 내 허리까지 키가 컸다. 포대를 묶을 수 있는 부위만 겨우 남기고 엄청난 양의 고구마를 담았다. 포대를 바닥에 '탈탈' 턴 뒤 주둥이를 겹쳐 비닐 끈으로 단단히 묶었다. 그 사이 아빠는 좀 생뚱맞지만 주유를 좀 하겠다고 고모에게 말했다. 주유? 여기서 기름을 넣는다고? 뒤를 돌아보니 냉장고만한 통 안에 기름이 가득 담겨있었고 아빠는 그 통에 연결된 호스를 아빠 차의 주유구에 꽂았다. 시골에서는 경운기나 농기계에 쓸 기름을 저렇게 큰 통에 담아두는구나 생각하는데, '내일 쓸 기름도 모지란께 째깐만 담어가~잉' 하는 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동생이 저렇게 말하면 치사해서 안 담겠다 할 법도 한데, 아빠는 못 들은 체하며 주유를 계속했다. 세상에나, 계기판도 안 보이는데 얼마나 주유했는지 양이 가늠이 될까 싶어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침내 바닥에 쌓인 모든 고구마가 포대에 담겼다. 엄마는 짐승들이 파먹었고 남겼을 것 같은 자투리 고구마까지 죄다 주워 담았다. 먼지까지 쓸어갈 기세였다. 저 고구마를 우리가 다 가져갈 거라고?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단인 아빠 차의 트렁크와 뒷좌석까지 빽빽하게 고구마 포대로 채워졌다. 주유를 마친 아빠는 차가 더러워지면 안 된다고 빈 포대를 자동차 시트와 고구마 포대 사이에 겨우 끼워 넣었다. 뒷좌석이 절반으로 줄어 민하와 내 자리가 좁아졌다. 엄마는 고구마를 이렇게 많이 얻어가니 자리는 좀 불편해도 된다는 식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고 나와 인사하는 민하를 보더니 고모는 '돈을 하나 줘야겠다'며 작은 손가방을 뒤진다. 고모에게 돈은 '하나'일까? 웃음이 나왔다. 됐다고, 고구마를 주셨으니 안 줘도 된다고 만류해도 호주머니를 한참 뒤지는 고모를 남겨두고 도망치듯 차에 탔다. 아빠도 엄마도 고모한테 돈을 받는 것은 멋쩍은 일이라며 황급히 시동을 걸고 마당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래도 고구마랑 기름을 이렇게 잔뜩 싣고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지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며 아빠는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려 멈춰 섰다. 그 사이 고모는 집에 들어가 꼬깃한 지폐 3장을 민하의 손에 쥐어줬다. 만 원짜리 한 장과 5천 원짜리 두장이었다. 아이에게 줄 만한 적당한 '돈 하나'가 없었던 모양이다. 정말 안 주셔도 되는데... 하며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조수석의 엄마는 아빠 어깨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말했다.


"오메 기름을 겁나게 많이도 넣어브렀네. 뭐 한다고 쓸 거는 남겨놔야한다드만...".


아빠는 멋쩍으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괜찮해!, 부잔디 뭐 어째!"


나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고모가 준 고구마는 다 공짜야?"

"고모가 우리한테 주는 거지~"


엄마의 대답은 새침했다. 문득 엄마 지인에게 보내질 택배박스 속 듬성한 빈틈이 떠올랐다. 어차피 우리에게 다 줄 고구마였으면 엄마 지인에게 보낼 고구마도 성의 있게 좀 채워줬으면 어땠을까. 고모는 그 고구마를 다 팔 것이 아니라 포대에 담아 우리에게 줄 것들이었으면서 왜 그 몇 개마저도 덜어내야 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고모의 마음이 궁금해져 엄마에게 되물었다.


"엄마, 고모는 엄마가 예뻐서 고구마를 그렇게나 많이 준가?"

"아빠가 짠해서 줬겠지.. 서울에 작은 아빠도 좀 보내면 좋겄드만 내가 좀 보내라 해도 생전 그 집에는 고구마를 안보내드라, 동서가 미운가 어쩐가...."


되돌아온 엄마의 대답은 가혹하고 슬펐다. 그 말 이후 엄마가 뭐라고 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해남고모에게 오빠는 어떤 사람일까, 우리 아빠가 고모에게는 어떤 오빠였을까.. 몹시 잦은 실패와 비운으로 산전수전 다 겪던 그 시절, 아빠의 시간들을 고모는 어떻게 위로했을까, 야무지게 다문 입술이 유난히 도드라지는 고모의 마음에도 친오빠에 대한 애틋함 같은 것들이 있었을까? 나는 나의 친오빠를 상상해 보다가 입을 뗐다.


"하긴.. 엄마 나도 오빠가 늙어서 우리 집에 들러 고구마도 가져가고 기름도 가득 채우고 간다 해도 별말 않겄네.."

아빠, 엄마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고구마 한두 개도 얄짤없던 고모의 얼굴이 한참 동안 뇌리에 머물러있었다.

땅거미가 지고 창밖에는 묵묵한 어둠이 찾아왔다. 한참을 응시하다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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