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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나 규정보다 피어프레셔

by SSOO


우리 집에서 작업실은 거의 일직선상에 있다.

모든 정식 신호등과 출구를 준수해 가면 300미터, 집 앞 작은 도로 건너 지하철역 상가 연결 출구를 이용하면 150미터.


집 앞 도로는 총 4차선의 작은 도로로 교통량이 많진 않고 지하철 쪽문으로 인해 무단횡단이 일상인 곳이다. 우리 집에서 상가 출구가 보일 정도고 15초면 닿는 곳.


300미터, 돌아가 봐야 모두 평지이고 내 걸음으로 신호대기를 포함해도 5분이 채 안 걸린다. 돌아간다 하기엔 좀 민망할 지경. 하지만 무단횡단과 쪽문을 이용하면 2분이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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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 횡단 대신 30미터도 안 되는 횡단보도로 돌아서 다니기 시작한 지 꽤 되긴 했지만 전엔 나도 이곳을 무단횡단해 출근했다. 부끄럽지만 지금도 주말처럼 차가 전혀 없을 때, 혹한/혹서기, 폭우 등이 내릴 땐 그냥 건넌다. 골목 입구에 커다란 감시 카메라와 경고 문구가 걸려 있음에도. 돌아가자 했다가도 다른 사람들이 다 건너면 나도 동참한다. 그러나 저 멀리서라도 경찰차가 보이면 당연하게 횡단보도로 향한다. 몇 년 전 순경에게 훈방당한 적이 있어서.


편안함과 그동안 문제된 적이 없다, 다른 사람도 다 건넌다.


규율과 제도가 있고 신호와 법을 지켜야 한다는 도덕적, 사회적 규범을 모두 인지하면서도 아주 쉽게 어긴다. 보지 않는 게 더 어려울 만큼 크게 붙어 있는 경고판도, 지켜보는 카메라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 다른 사람이 하면 적당히 묻어가며 편안함을 우선한다. 그리고 이 모든 어김에 내가 뭘 대단히 잘못한다는 죄의식도 약하고 나 하나쯤, 이럴 땐 괜찮아라 생각한다. 심지어 규칙을 지키는 게 가장 안전한 길이란 본질도 망각한다. 규칙을 만들고 준수하게 하는 게 직업이고 보통은 FM에 가깝게 사는 편인 나도 적당히 합리화해가며 덮는 게 한 둘이 아니다.


회사에서 왜 제도가 있고 규칙이 있는데 저러냐 이해 불가한 사람이 있고, 왜 핵심가치 전파가 안 되냐 한숨 쉬는 이유다. 많은 원인 중엔 약한 피어 프레셔가 있다.


무단횡단 하려 할 때 옆에서 누가 뭐라 하거나 최소한 "쟤 뭐야?!“란 시선으로 쳐다만 봐도 돌아가거나 건너도 얼굴 숙이고 부끄러워하기라도 했을 거다. 그게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는 시도도 안 할 거고. 경찰차가 나를 못 볼거리여도 내가 인식하면 규칙을 자연스레 지킨다. 피어프레셔란 이런 거다. 다 보고 안다란 것만큼 두려운 게 없다. 누가 보지 않아도 그렇다 생각하면 모든 언행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버젓이 달려 있고, 모든 걸 지켜보며 촬영하는 감시 카메라는 유명무실한 제도나 규정에 빗대도 무방하다.


원래부터 대단히 양심적이거나 반듯할 필요도 없다. 하기 싫어 억지로인 것도 상관없고. 중요한 건 서로 약속된 것들을 지킨다는 데에 있다. 착한 사람이 아니어도 착한 척하고 살면 그 척이 쌓여 결과적으로 착한 이가 되듯이.


그래서 조직에서 뭔가를 지향하고 그를 위해 뭘 만들어 모두가 얼라인되게 하고 싶다면 가장 중요한 건 제도와 규칙의 설계가 아니라 피어 프레셔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하고 유지할 거냐에 훨씬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그게 꼭 강압적이거나 강제적이지 않다면 더할 나위 없을 거고. 그게 진짜 조직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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