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슬작가 짧은 소설 연재
올해 54살, 동갑인 그녀의 남편이 평소와 다르게 퇴근했을 때의 일이다. 여느 때 같으면 현관에서부터 요란한 인사로 시끌벅적해야 하는데 이상했다. 인기척에 부엌에서 나온 그녀는 처음에는 옆집에서 난 소리로 착각했다. 하지만 가지런하게 놓여있는 신발을 발견하고는 안방을 확인했고, 남편이 침대에 말없이 걸터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남편은 비밀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 있었어?"
"어? 아니. 일은 무슨 일..."
“그래, 그럼 얼른 씻고 저녁 먹으러 와. 오늘은 소진이도 안 찾고, 진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아니... 일은 무슨 일...”
시금치나물로 향하던 젓가락이 멈칫하고 되돌아오기를 세 번 정도 했을까, 젓가락을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지난번에 자기가 사 왔던 약 있잖아?"
“응? 무슨 약?”
“아니, 자기가 나도 이제 바를 때가 되었다고 하면서 사온 약 있잖아...”
“새치... 염색약?”
“그거, 지금도 있어?"
“갑자기 왜? 하얀 머리카락도 매력 있다면서?"
"그랬는데..."
"눈에도 안 좋고, 아직은 안 바른다고 해서 서랍에 넣어두었는데”
"그랬지. 그런데, 이제 나도 한번 발라보면 어떨까 싶어서"
"잘 생각했어. 나이 들어 보인다는 소리 쑥 들어갈 수 있도록 멋지게 발라줄게"
갑작스러운 남편의 변화에 내심 기뻐하면서도 그녀는 속으로 얼마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고,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남편은 부부모임을 가거나 가족모임(특히 친정식구 모임일 때는 더욱 강하게 요구했지만)을 갈 때 머리 염색도 하고, 그녀가 추천해 준 옷을 입으면 좋으련만 남편은 요지부동이었다.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 이었다. 한껏 멋을 내어 남편에게 자랑하러 갔다가 겉모습이 중요한 게 아니라 알맹이가 더 중요하다는 소리를 들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남편이 갑자기 새치 염색약을 찾고 있으니, 오래 살고 볼일이라고 생각하며 설거지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날따라 유난히 집으로 택배가 많이 도착했다.
그녀가 주문한 거라고는 소진이 간절기에 입을 외투와 주방 세제밖에 없는데 계속 벨이 울렸다.
"유지만 씨 계세요? 택배입니다"
"네, 잠시만요"
"유지만 씨 택배 왔는데, 집에 계시나요?"
"네, 잠시만요. 문 열어드릴게요"
“유지만 씨 댁이죠? 택배 왔습니다”
“아.. 네, 잠시만요”
남편 앞으로 온 택배가 궁금했지만, 자신의 물건에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궁금한 마음을 꾹 누르고 있었다.
딩동 딩동.
“소진아~~ 아빠 왔다"
적당한 비음과 고음 섞인 목소리로 남편이 소진이를 찾았고, 약속이나 한 듯 소진이가 제방에서 부리나케 달려 나와 품에 안겼다. 한바탕 소진이와 요란스럽게 뽀뽀세례를 마친 남편이 그녀에게 물었다.
"택배 왔을 턴데, 어디 뒀어?"
"응? 저기 안방 화장대 옆에"
"그래?"
숨을 고르며 안방 문을 여는 남편을 그녀가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 들어왔다.
"그렇잖아도 궁금했어. 갑자기 택배가 많이 와서 궁금했어. 뭘 산 거야?"
"어... 그게..."
가위로 택배 봉투를 조심스럽게 자르던 남편이 잠시 멈칫거리더니 그녀를 올려다보면서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나 티셔츠 하나 사고... 청바지도 하나 샀어..."
"어? 티셔츠? 청. 바. 지?"
"응..."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남편은 청바지라면 기겁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이 청바지를 샀고, 며칠 전에는 새치 염색약을 찾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자신만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쳐갔다.
"자기는 기지 바지만 입잖아. 등산 갈 때도 기지 바지 입는 사람이... 갑자기 청바지?"
"어... 그게 실은... 그러니까"
"자기. 설마 이 티셔츠 자기 입으려고 산 거 아니지?"
"어? 그게 실은... 그러니까... "
그렇잖아도 큰 그녀의 두 눈이 바깥으로 튀어나오기 직전이었다.
그렇잖아도 남편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중이었다. 같은 동에 살고 있는 지연 언니가 소진 아빠가 좀 이상하다는 둥, 수상하다는 둥, 이렇게 저렇게 말을 붙여와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며 부인했었다. 하지만 다른 한 켠에서는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조금 더 솔직하게 고백하면 그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녀만 모르는 어떤 다른 스토리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 혼자 멀리 뚝 떨어져 배경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요즘의 모습을 보면 분명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라고 얘기했던 예전의 남편이 아니었다. 전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칼라의 티셔츠는 물론, 청바지, 신발, 거기에 크로스백까지 배달되는 상황은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상황, 딱 그런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결심은 그녀에게 전에 없던 용기를 만들어주었고, 결국 스스로 뚜껑을 열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절대 울거나 매달리지 않을 거야, 그래도 잘못을 빌면 용서해 줄까? 그 부부는 어떻게 되었다더라? 지난 주말에 본 막장 드라마를 떠올리며 방안 구석구석 제 마음대로 떠다니는 물음표를 애써 끌어내렸다. 그리고는 오후 햇살이 거실에서 발자취를 감춘 어느 날, 크게 동요하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퇴근하는 남편을 따라 안방에 들어갔다. 남편은 코트를 침대 위에 걸쳐놓고 깊은 고민에 빠진 것처럼 옷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은 무슨 옷을 입으면 좋을까?”
"어?..."
"내일 무슨 옷을 입으면 좋을 것 같은지 물어봤어..."
우주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지금이야'라고.
"자기... 얘기 좀 해!"
"무슨?"
"그러니까..."
"응?"
“솔직하게 얘기해 줘. 나 전부 들어줄 수 있어”
“뭘 말하라고? 솔직하라는 건 무슨 말이야?”
“솔직하게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다 이야기해 줘. 나 다 들을 수 있어!”
“아, 답답해. 도대체... 무슨 말이야?"
"자기... 요즘 여자 만나지?"
“뭐?”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느낌이었다. 강제로 어떤 생각을 해보려고 해도 맥락적으로도 맞지 않고 우연적으로도 연결되는 것이 없었다. 온도를 전혀 느낄 수 없는 말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요즘... 자기 여자 생긴 거 아니냐고... 지금 동네에 소문이 자자해. 소진 아빠... 바람났다고!"
"뭐. 라. 고?"
산책을 하다가 새똥 맞을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가만히 있는 풍선이 순식간에 터지면 어떤 소리가 날까. 머릿속에서 요란스럽게 사이렌이 울기 시작했다. 삐... 삐... 삐...
이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건 나이를 거저먹지 않았다는 뜻 이리라.
"하여간... 아줌마들이란...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면 ... 아니 그러면 도대체 요즘 왜 그러는데?”
힘들수록 정면승부라고 했던가. 어설프게 이야기를 했다가는 밤새도록 잠은커녕, 아라비안나이트 후속작을 찍을 분위기였다. 그래서였을까. 남편의 입에서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 새어 나왔다.
"젊어 보이고 싶어서"
"어?"
그녀는 그녀의 귀를 의심했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겉모습은 거들떠보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커다란 눈을 부릅뜨며 천천히 남편의 표정을 살피며 애써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니, 갑자기 젊어 보이고 싶다니?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그게..."
"9층에 이사 온 아이 있잖아..."
"9층? 누구?"
"지난번에 자기랑 부부모임 갔다가 돌아올 때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애..."
“아.. 수현이?”
“수현이?”
”머리 길게 땋아 다니는 수현이. 지난봄에 이사 왔을걸..."
“그래, 그 아이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거든..."
“어..."
“근데 걔가 나보고 할아버지 몇 층 사세요? 그러잖아?"
“뭐?”
"처음에는 아이라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집에 와서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야... 아니, 어떻게 보이길래 아이한테 할아버지로 보일까... 싶으면서...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머리 위로 말풍선이 계속 떠다니는 거야. 할아버지 몇 층 사세요? 할아버지 몇 층 사세요? 할아버지 몇 층 사세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말풍선이 머리 위를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저절로 상상이 되었고, 어린아이의 말에 며칠 동안, 아니 몇 주 동안 풀이 죽었다는 남편의 고백이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자기는... 아직 할머니 소리 못 들어봤지?"
"뭐?"
"할머니 소리 들어봤어?"
“아니... 할머니는 무슨? 이모 소리만 듣고 살고 있는데...”
"그러니까... 자기는 내 마음 모를 거야... 내가 이 나이에 할아버지 소리 듣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괜찮아. 괜찮아. 애들이 뭘 알아? 그냥 툭 나온 말일 텐데...”
“아니야. 자기는 몰라... 할아버지라는 소리, 들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야...”
“그래, 그래 그럴 수 있어... 아직 어리잖아... 애들이 몰라서 그러지”
“머리 염색도 하고, 옷도 사고, 내가 할아버지가 아니라는 거 보여주고 싶었다고..."
"그래, 그래, 그 마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
"그래, 그럼..."
“그래서 매일 신경 써서 다니고 있는데, 아직까지 그날 이후로 만나지를 못했어..."
"뭐?"
"혹시 그 사이에 다른 데로 이사 간 건 아니겠지?"
"어?..."
"내가 할아버지 아니라는 것, 꼭 보여줘야 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