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도의 말들>을 읽고
예전에 어떤 독립 서점에서 한 권의 책에서 좋은 문구 하나만 발견해도 좋다는 문구를 본 적이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책이 아니더라도 후한 평가를 내렸다. 별 볼일 없는 책이라도 내 마음에 와 닿는 문장 하나면 됐다. 사람도 책 읽듯이 듬성듬성 봐주면 좋을 텐데. 이 책은 한 페이지마다 기억하고 싶은 문구들이 넘쳐나는 책이다.
편지는 분노와 미움보다는 애정과 배려에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다. - 시인 박준, <태도의 말들> 엄지혜 p. 33
2010년 3월 18일 목요일에 내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편지를 받았다. 학교가 끝나고 미미는 내게 쪽지를 건넸다. 그 편지는 내가 살면서 읽은 글 중에 제일 웃긴 글이었다. 쪽지의 내용은 내 생일인 걸 잊을 뻔 했다고, 어떤 경로로 선물을 샀다고. 그때 미미가 즐겨 그리던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51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제일 앞자리 앉아서 히죽히죽 웃으면서 몇 번을 읽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직관적으로 받은 건 처음이었다. 미미는 항상 날 귀하게 대해줬다. 나는 사랑을 주는 법이 서툰 중학생이었다. 좋아하는 친구 사이에 어떤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지 잘 몰랐다. 나는 미미 근처에 별로인 친구를 벌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했다. 우리는 그렇게 수 십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지금 나에게서 발견되는 다정함은 미미에게서 온 거다. 미미 덕에 나는 편지를 받는 일이 사랑을 받는 일이라는 걸, 편지를 쓰는 일은 애정 없인 못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PS. 미미와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나는 주로 남자애들을 때리는데 관심이 많은 왈가닥이었고, 미미는 우리 반에서 만화를 제일 잘 그렸다. 미미가 그린 만화는 우리 반에서 유행했고, 나는 그 만화를 좋아했다. 글과 만화에 대한 미미의 천재성은 어릴 때부터 특별했다. 미미의 자서전이 나온다면 유년기 부분은 내가 맡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 속도로 살고 싶어요. 매일매일 바쁘고 치열하고 촘촘하다고 해도 그게 나랑 맞는 속도면 별 문제가 없을 거예요. 서울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내가 살고 싶은 속도를 내가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어요. 내가 기어를 쥐고 있는 것 같지 않았어요. 굉장히 많은 관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내 속도로 살기 위해서는 이 관계들 속에서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적어도 핸들은 내가 쥐고 있어야겠다. 생각한 거예요.
루시드폴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고. 그는 "그냥 말수가 좀 적고 좀 멍청하고, 그러면서도 귀여운 할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꼭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 <태도의 말들> P. 103
내가 기어를 쥐고 있는 삶을 살고 싶다. 그게 가장 돈을 잘 버는 길, 남들이 보기에 옳은 선택이 아니더라도. 내 속도로 살아가고 싶다. 나도 그러다가 좀 귀엽고 멍청한 할머니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 곁에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또 얼마나 좋으려나.
나는 소극적인 태도로 그러한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견해를 의심할 이유도 없었고, 그렇다고 무조건 믿을 필요도 없으니까.
-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태도의 말들> 엄지혜, P.179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그럴 때 나를 제일 먼저 의심하고, 남의 말을 확 받아들여버린다. 단언하면서 말하는 사람들을 멀리하는 편이다. 내가 약한 걸 알아서다. 그럴 때 소극적인 태도로 의견을 받아들이고 싶다. 인생 살아가면서 남의 말을 의심하지도, 믿지도 않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오래 지켜보고 천천히 좋아지는 관계가 좋다. 냉정한 첫인상을 준다 해도 내 마음을 굳이 크게 포장하고 싶지 않다. 내 애정을 불특정 다수에게 주고 싶진 않으니까, 책임지지 못할 애정은 타인에게 괜한 기대만 안길 뿐이다.
<태도의 말들> P. 159
아빠는 사람과 서서히 친해지라고 말했다. 갑자기 확 빠져버리는 관계는 위험하다고. 기질이 금사빠라서 확 친해지는 경우 정말 잦았다. 그러다 많이 대였다. 지금은 내 속도에 맞게 천천히 가까워지는 관계가 좋다.
누군가에게 내가 냉정하게 보이는 걸 허락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고 해야 하나.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이고 싶어 했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기를 잘했다. 싫은 사람과 밥 한 끼 정도는 먹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가진 애정만큼 상대방에게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내 표현이 과해서 1만큼 좋아하는데 50만큼 표현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 종류의 과함은 종국엔 화를 불러왔고, 내 인생에 분기마다 날 귀찮게 했다.
'책임지지 못할 거면 길고양이에게 함부로 밥을 주지 말라'는 말을 떠올리려고 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나눌 여유가 없는 사람에 가깝다. 나는 내 한정된 에너지를 중요한 사람에게만 쏟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다정한 척하지만 실은 무뚝뚝한 면도 많다. 나는 다정하고 세심한 내 캐릭터를 수행해야 하는 일상을 원망할 때도 많다. 그래서 최근에 속한 단체에서 '마들렌 님은 진짜 책도 많이 읽고 다정하신 것 같아요'라고 누군가 말하자, 손사래를 치면서 싫다고 했다. (오바육바) 친절함이 디폴트값이 되면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한지. 누가 보면 대단히 상냥한 줄 알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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