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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프카 Aug 26. 2019

샌드백과 인간관계

좋은 상대를 만났다. 일단 조용하다. 쓸데없이 말하지 않고, 내게 맞춰 반응한다. 아무리 험하게 다루어도 불평하지 않는다. 이름은 샌드백. 여느 다른 관계처럼 자주 보고 익숙해질수록 더 호흡이 맞다. 주먹과 샌드백이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경쾌할수록 내 마음이 뛴다. 좋은 소리는 적당한 타이밍과 힘이 중요했다. 안간힘을 쓰고 정신없이 달려들면 내 손목만 아팠다. 반복되는 훈련과 경험을 통해 나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 중년이 샌드백을 바라보며 멀뚱하게 서있었다. 그날도 나는 샌드백을 두드리고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다 그 장면을 목격했다. 차분한 인상이셨는데, 10분 정도 지났을까. 조심스럽게 다가가 슬쩍 더듬고, 이어서 주먹을 쥐고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다 갑자기 정색을 하고 때리기 시작했다. 나중엔 웃통까지 벗고 미친 듯이 후려쳤다. 손목 상하니 조심하세요,라고 충고했지만 듣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때로는 증오의 빛(?)마저 띠며 주먹을 연신 날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조금 섬뜩했다.



주먹이 멈추자 다시 침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헐크였다. 한참 샌드백과 싸우던 장년이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복싱하길 잘했네요." 그간 느꼈던 스트레스와 감정을 모두 쏟아낼 수 있었다며 흡족해하셨다. 머리를 긁적이며 "제가 좀 요란했죠. 늘 서툴러요.  특히 사람도."라고 말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여러 의미가 담긴 웃음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섬세하게 그의 모습을 그려낼 실력은 없지만, 차분하고 허튼 행동 안 할 바른 분으로 보였다. 지친 기색이었지만 한결 밝아 보였다. 우리 대화를 멀리서 듣던 관장님이 다가왔다. 나와 닮은 미소를 지으며 "내년 봄에 시합 한 번 나가보시게요."라고 말했다. 순간 멈칫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나도 똑같은 제안을 지난달에 듣지 않았는가. 복싱 1일 차 장년에게도 저런 제안을 하다니.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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