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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arlet Mar 12. 2024

[일상 이야기] 나의 우울은 지용성일까 수용성일까

지용성 우울과 수용성 우울, 그리고 또 다른 우울이 있다

지인들은 날더러 말한다. 너는 참 밝고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그 평판을 들으면서 나는 홀로 뿌듯해한다. 그런 평가는 내게 기쁨과 자부심을 준다. 이번에도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었구나!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나는 생각보다는 마음이 많이 아픈 사람이다. 이건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우울증이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우울증이라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대다수의 우울을 두 가지로 분석한다. 하나는 지용성이고, 하나는 수용성이다. 지용성 우울은 기름으로 씻어내야 한다. 배부르게 고기를 구워 먹는 것이 좋다. 고기기름이 어려운 사람은 생선기름으로라도 위를 잘 씻어 내야 한다. 잘 먹고, 잘 자면 낫는 우울이다. 반면에 수용성 우울도 있다. 수용성 우울은 물로 씻어내야 한다. 우선은 땀을 많이 흘려야 하는데, 달리기도 좋고 다른 운동도 좋다. 운동을 평소에 하지 않는다면 새천년 건강체조 한 번으로도 땀이 날 것이다. 그 이후에, 샴푸와 린스와 바디워시를 아낌없이 써서 박박 씻는다. 필요하다면 때밀이를 써도 좋다. 그렇게 씻고 머리를 말리고 나면 낫는다.  


그러면, 다른 우울이 있다는 말인가? 있다. 내가 20년을 넘게 부정했으나, 기름으로도 물로도 씻기지 않는 우울이 있다. 나는 이걸 참 별것 아니라고 치부했었다. 왜냐면, 딱히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 나의 행동과 성격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우울증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우울증이라고 말해 줘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티가 나는 부분이 아니다.


나는 홀로 있을 때, 그냥 죽고 싶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용기가 없어 자살 시도는 꿈도 꾸지 못했기에(애초에 자해조차도 할 성격이 아니다.) 이 생각은 딱히 내게 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자기파괴적인 행동으로 이어진다. 특히, 술을 먹을 때가 심했다. 나는 술을 자주 마시진 않았는데, 꼭 먹을 때마다 토할 정도까지 가서야 마시는 것을 멈추곤 했다. 그 행동에서 우울을 파악하고 병원에 데려가 준 친구에게는 고마운 마음 뿐이다. 나는 그것이 우울증이라는 '병'임을 병원에 가서야 알았다.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자타공인 갓생러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고, 삼시세끼 밥을 잘 차려 먹고, 운동도 부지런히 하는. 내 어느 부분이 우울과 맞닿아 있단 말인가? 부정은 분노로 이어진다. 그럴 리 없다는 강한 생각이 의사에 대한 불신을 낳았다. 나의 다정한 친구는 내게 속삭여 주었다. "그런 게 아니야. 네 엄마가 항상 혈압약을 먹듯이, 그냥 그 쪽이 원래 안 좋은 사람이 있는 거지." 그리고 내 노력을 치하해 주었다. "그리고 네가 취업해서 그렇게 잘 지내는 건 진짜로 네 노력 덕이니까, 네 노력은 여전히 유효해."


그제서야 나는 수많은 불신과 혐오와 분노와 증오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어쨌건 나의 갓생은 나의 삶에 유효했고, 병으로서의 우울은 약으로 막는 게 최고라는 사실. 엄마가 혈압약을 먹듯 내가 약을 먹는 것은 운동이나 식사처럼 나를 챙기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아, 약을 먹어야지!


다만, 집안 사정 때문에 엄마는 여전히 우울이 약을 먹지 않아도 나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기름을 먹고, 잘 자고, 운동을 하고, 씻으면 나으리라고. 나는 엄마의 믿음을 긍정한다. 엄마의 그 믿음은 보통에 대한 간절함이다. 딸이 정상인으로 살았으면 하는 소망이다. 현실로 잔인해지느니 내가 좀 더 운동을 할게, 라고 말하는 편이 훨씬 다정하고 평안하다.

 

아침에 약을 챙기고, 저녁에 약을 챙긴다. 오늘도 나는 약으로서 평안하다. 너무너무 마음이 힘들 때, 때로는 병원을 찾는 것도 나쁘지 않다. 지용성도, 수용성도 아닌 우울은 약으로만 해결이 가능할 테니까. 이것은 경험담이다. 좀 더 빨리 병원에 갔다면, 나는 좀 덜 나를 미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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