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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구루 Nov 10. 2023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영화 <화양연화>

[사랑은 아무도 모르게 시작된다]

둘의 시작이 궁금했는데 이제 알겠어요. 많은 일이 나도 모르게 시작되죠.

사랑의 시작을 짐작해 보다가 서로에게 감긴 주모운과 소려진. 이들은 사랑을 속삭인 적이 없다. 감히 속삭일 수 없었다. 불륜을 저질렀지만, 여전히 배우자인 ‘그들’ 때문인지, 주변의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자기혐오 때문인지. 모운과 려진은 서로의 마음을 알지만, 알 수 없었다. 알아서는 안 됐다. 그렇게 회피하지만, 이들은 결국 인정했다. 인정하고, 마음의 비밀을 품은 채 멀어졌다.



[달달하지만 씁쓸한, 커피 같은 사랑]

모운과 려진은 대화할 때 계속해서 배우자에 대한 이야기를 끼워 넣는다. 그래서인지 둘의 입은 어색하고 내외한다. 배우자의 불륜을 거듭 이야기하며 씁쓸해하지만, 아찔한 시선으로 달달한 눈길을 주고받는다.

둘은 말로 달달함을 내뱉지 못한다. ‘그들과 다르다’고 믿기 때문이다. 려진은 남편의 배신에 처절함과 서글픔, 비참함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모운에 대한 감정이 커지고, 이를 애써 부정한다. 모운의 접근을 막지만, 그가 물러나지 않는 것은 가만히 둔다. 오히려 멀어지는 것을 걱정한다. 가까이 오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관계. 이들의 사랑의 끝은 처음부터 보여지고 있었다.



[어느 쪽이 먼저였을까]

국수 사러 가면서도 예쁘게 차려입네.

불륜은 서로의 배우자들이 먼저 했지만, 과연 감정의 시작도 그들이 먼저였을까? 화양연화의 시그니처 사운드는 그들이 어떠한 큰 교류가 없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치명적이고, 관능적인 브금. 모운과 려진은 눈을 마주치게 된다. 그 공간, 시간, 공기, 분위기는 꼭 둘만 있는 느낌을 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생긴 둘의 밀회 공간, 국수 가게. 단지 배우자가 바람피운 상대의 배우자를 보기 위해서라면, 차려입고 가지 않았을 것이다. 배우자의 불륜은 계기였을까 도구였을까. 모운과 려진의 시점으로 영화가 진행되었지만, 참 모호하다. 이는 모운과 려진이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감정에 가면을 씌웠기에 모호할 수밖에 없다.


[자기 합리화]

우리 사이에 다른 일은 없지만 당신이 오해받는 거 싫어요. 어떻게 생각해요?

서로의 회사에 전화를 걸고, 신발이 아플까 버선을 준비하고, 깨죽을 만들고. 이들은 직접적으로 사랑을 외치진 않았지만, 분명히 사랑을 했다. 마주하면서 얼마나 많은 합리화를 했을지.

국수를 먹고 싶었을 뿐, 그를, 그녀를 보려고 간 건 아니야.

무협 소설을 읽고 싶을 뿐, 보고 싶은 건 아니야.

주인집의 의심을 사고 싶지 않을 뿐, 모운의 집에서 못 나가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야.

나도 마침 깨죽을 먹고 싶었을 뿐, 모운이 걱정된 건 아니야.

의심할 여지가 한 톨도 없지만,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 수 있으니 작업실을 따로 마련한 거야.

담배를 피는 건 려진이 계속 생각나서가 아니라 소설이 안 써지기 때문이야.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회사에 전화하고, 비 오는 날 기다리고, 같이 호텔에 가고, 같은 공간에 있는 건 아무리 자기합리화해도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었다.

그나마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은 모운이었다. 그래서 려진이 관계를 끊어주길 바랐다. 그러나 확실히 결정하지 못해 울음을 터트린 려진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 무언가 결정하진 않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그들은 넘지 못한 선을 넘었다. 손을 잡고, 어깨에 기대어 택시를 탄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할 수 없다. 합리화했던 본인을 인정하고 불륜의 선을 넘기엔, 그들도 불륜으로 상처받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질문]

모운과 려진의 배우자들은 정말 불륜을 저질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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