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평생 그리워하며 살다 죽음을 결행하는 로맨티스트에 관한 이야기.<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이하 ‘어느 예술가’)이라는 제목으로 2013년 국내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 <Poulet aux prunes>(자두를 곁들인 닭고기)는 흔히 이런 식으로 소개되는데, 홍보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영화를 보는 데는 방해가 된다. 주인공 나세르 알리(마티유 아말릭)의 사연을 아름답게만 보려고 할수록 우리는 한 남자의 ‘나 홀로 로맨스’가 빚어내는 가족의 불행을 견디거나 못 본 체해야 한다. 바이올리니스트인 나세르 알리는 결혼 후에도 남편이나 아버지 역할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내팽개치고는 자기 방에서 바이올린만 켜며 살고 있다. 그의 연주는 직업적 행위가 아니라 그리운 옛사랑을 되새기는 세레나데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라는 식의 수식을 고수한다면 이 영화는 불편해지기 십상이다.
골방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나세르 알리. 영화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 스틸컷
작품에 대한 좋은 읽기란 우리를 돌아볼 수 있거나 위로를 얻게 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나로서는 아름다움만을 지지하기 위해 여러 아이러니를 합리화하거나 덮어버리는 인지부조화를 용인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서사 자체가 부조리하다고 단정하는 건 섣부르다. 이야기가 애초 틀려먹었다고 선언해버리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게 된다. 설령 작가나 감독이 ‘좋은 서사’ 구축에 실패한 경우라도 독자와 관객은 ‘좋은 읽기’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영화가 아니고 배급사가 마케팅에 무리수를 뒀을 뿐이지만) <어느 예술가>에 대해서도 좋은 읽기가 가능하려면 주인공은 선하다(완벽하다)거나 사랑은 언제나 옳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족을 버리다시피 한 사람을 그가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로맨티스트라 칭할 수 없고, 이뤄지지 못한 것이라고 해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랑을 동정할 수만은 없다. 이 영화가 억지스러운 로맨스나 막장드라마로 잘못 읽히지 않으려면 ‘슬픈 순애보’ 같은 말치장부터 떼어버려야 한다.
무책임한 남자
1958년 가을 이란 수도 테헤란. 아끼던 바이올린이 부서지고 대체할 악기를 찾지 못하자 나세르 알리는 죽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일단 8일 뒤 죽는다. <어느 예술가>는 그사이의 이야기다. 우리는 나세르 알리가 종국에 삶과 죽음 중 무엇을 선택하게 될지, 뜻대로 죽음을 맞게 될지 같은 문제로 궁금해하지 않아도 된다. 영화는 이미 세상을 떠난 남자의 삶을 그가 죽기로 한 날로부터 하루하루 날짜가 적힌 회고록이나 관찰기처럼 보여주면서 실타래 풀 듯 더 먼 과거로 돌아가고, 시간을 빨리 감아 저 먼 미래로도 건너간다. 시간을 넘나들며 한 남자의 50년 인생을 정리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눈부신 사랑이나 이별이 아니라 실연으로 영원해져버린 ‘박제된 사랑’에 사로잡혔을 때 드리우는 짙은 어둠이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 그 그림자/그늘은 우리를 사랑하거나 우리에게 사랑받아야 할 이들에게까지 드리움으로써 실은 아무 잘못이 없는 그들마저 불행하게 만든다.
길에 주저앉아 있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여자에게 시선을 뺏기는 나세르 알리. 영화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 스틸컷
나세르 알리는 무책임한 가장이다. 영화는 이를 감추기는커녕 부각한다. 나세르 알리는 생계를 위해 노력하지도, 집안일을 거들지도 않는다. 방에 틀어박혀 홀로 바이올린을 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쩌다 어린 자녀를 맡게 되면 남의 자식을 떠맡기라도 한 것처럼 귀찮아한다. 그가 새 바이올린을 구하러 가겠다고 통보하는 장면을 보자. 아내는 자신이 온종일 일해야 하니 아들을 데려가라고 하지만 나세르 알리는 “애를 달고 갈 순 없다” “당신이 알아서 해야지”라고 말한다. 어쩔 수 없이 아들과 동행하게 된 그는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게 아니라 ‘달고 가는’ 모습이다. 장거리 버스 안에서 아이가 떠들어 승객들이 불편해하는데도 내 자식 아니라는 듯 나 몰라라 하고, 시장통에서는 바이올린 가게를 찾는 데 정신이 팔려 아들을 두고 가기도 한다.
사랑의 양면성
평생 한 여자만 사랑했다는 사실을 주시하며 아름다운 면만 부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세르 알리의 사랑을 그저 긍정하게 되면 우리는 그의 불편한 언행들까지도 수긍해야 한다. 사랑은 원래 이기적인 것이다, 라며 덮어주기에는 찝찝하다. 우리가 그의 변호인이 될 이유는 없다. 사랑을 고귀한 것으로만 보존하고 싶은 바람을 내려놓으면 <어느 예술가>가 묘사하는 사랑의 어두운 면들을 응시할 수 있다. 빛의 반대편에 어둠이 드리우듯 사랑에도 그늘이 있다. ‘사랑’이라는 빛을 받는 이가 드리우는 그림자. 우리가 빛에 다가갈수록 그 어둠은 커진다. 아내 파랑기스(마리아 데 메데이로스)에게 자신을 봐주지 않는 나세르 알리는 언제나 그늘진 ‘뒷모습’의 사람이었다. 나세르 알리가 옛사랑을 그리워하며 독방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은 그림자 연극처럼 새카만 실루엣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몰래 지켜보며 괴로워하는 파랑기스의 시선이기도 하다. 여전히 사랑받기 원하는 파랑기스는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자두를 곁들인 닭고기’ 요리를 만들어 가져다주지만 나세르 알리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삶의 의욕을 잃은 것이 아내 탓이라고 비난한다.
아내(왼쪽)와 언쟁을 벌이는 나세르 알리. 영화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 스틸컷
영화는 사랑의 양면성을 고발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놓지 못하는 과거의 사랑 때문에 당신을 지금 사랑하는 이들이 괴롭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이렇게 꼬집으려는 듯이. 전적으로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면 나세르 알리를 이런 남자로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세르 알리는 고집스럽게 자신만의 빛을 향해 서 있고, 파랑기스를 비롯한 가족은 어둠 속에 방치돼 있다. 시각적으로도 영화를 지배하는 건 어둠이다. 명암이 강한 대비를 이루는 여러 장면에서 빛은 어둠에 묻힌 인물의 표정을 간신히 더듬을 정도로만 주어진다. 나세르 알리의 방은 늘 캄캄하다. 그곳에 들어서면 누구나 어둠에 휩싸인다. 나세르 알리의 공간에는 커다란 창문과, 그곳을 통과해 들어오는 빛, 그 빛과 함께 그림처럼 새겨지는 창틀의 그림자가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나세르 알리는 빛을 향해 날아가고 싶을 테지만 어둠에 머물며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받을 뿐이다.
사랑을 위한 희생양
나세르 알리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여자는 세 명이다. 사랑의 열병을 앓게 한 첫사랑 이란(골쉬프테 파라하니), 사랑 없는 결혼을 강요한 어머니 파르빈(이사벨라 로셀리니), 어느새 악처 노릇을 하고 있는 아내 파랑기스. 세 여자 중 유일하게 파랑기스만이 사랑을 받지 못한다. 사랑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나세르 알리에게 원치 않는 결혼을 밀어붙인 건 어머니였고, 거기에 따른 건 나세르 알리 자신이었다. 나세르 알리의 실연에도 파랑기스는 책임이 없다. 장애에 부딪혀 물러선 건 이란이었다. 그러나 나세르 알리는 이란과 어머니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한 아내를 원망한다. 생계와 집안일을 다 짊어진 파랑기스가 잔소리를 늘어놓자 나세르 알리는 “그럼 직장인과 결혼하지 누가 음악가랑 하라고 했느냐”고 쏘아붙인다. 그런 그가 30년 전 “가난한 음악가가 내 딸을 어떻게 먹어 살릴 건가”라고 묻는 이란의 아버지에게는 “일해서 돈을 벌겠다”고 공언한다. 그가 아내 파랑기스를 대하는 태도는 예술이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랑의 문제였다.
시계방에서 첫사랑 이란(가운데)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나세르 알리. 영화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 스틸컷
파랑기스가 남편을 증오하는 건 가장의 역할을 내던졌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이고, 옛사랑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세르 알리는 10년 가까이 함께 살면서도 파랑기스를 사랑한 적이 없다. 그가 아내 이마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난 당신을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 단 한 번도. 뇌에 단단히 새겨”라고 말하는 장면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어째서 나세르 알리의 원망과 분노는 아내를 향하는 것일까. 우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무엇을 완벽한 것으로 보존하기를 원한다. 예컨대 모성과 첫사랑은 누구라도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은 대상일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경우에는 그(들)에게 향해야 할 원망까지 다른 이(들)에게 쏟아 붓기도 한다. 나세르 알리에게 파랑기스는 자신만의 ‘완전한 사랑’을 보존하기 위한 희생양이었을 것이다.
마지막 기회
행복은 잠시였고 불행은 평생이었다. 나세르 알리는 이란이라는 빛을 향해 서 있었지만 그 빛의 실체는 가 닿을 수 없는 것이었다. 파랑기스에게는, (짝)사랑해서 결혼했지만 한 번도 마음을 열어주지 않은 나세르 알리가 그런 존재였다. 나세르 알리가 죽기로 결심한 이유가 실은 바이올린이 부서져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는 죽음에 손짓하기 오래전부터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거지 행색으로 나타난, 신이나 예언자 같은 남자가 나무란다. “실연의 상처가 커서 마음을 닫아버렸죠. 아무것도 당신 마음에 못 들어오게. 잘못 생각한 겁니다. 삶을 포기했죠.” 그토록 기다리던 저승사자가 찾아왔을 때 나세르 알리는 정작 줄행랑을 친다. “제가 마음을 돌리기엔 좀 늦었나요?”라고 묻는 그에게 저승사자는 말한다. “조금 늦은 게 아니라 너무 늦었다.” 죽음에 거의 다다른 나세르 알리의 상태에 대해 의사는 “환자가 삶을 포기해 어쩔 수 없다”고 답한다.
침대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나세르 알리와, 그를 찾아온 저승사자(오른쪽). 영화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 스틸컷
결혼 전 가족들은 “아직 젊으니 시간이 지나면 잊게 된다” “결혼해서 살다 보면 사랑도 생긴다”고 말했지만 나세르 알리는 자신의 장담대로 평생 이란을 잊지 못했고 파랑기스를 사랑하지 못했다. 자두를 곁들인 닭고기는 남편에게 사랑받기 원하는 파랑기스의 마지막 노력이었고, 나세르 알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이를 무참히 내치고 ‘악마’가 돼버린 나세르 알리는 3일 뒤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서야 파랑기스의 얼굴을 쓰다듬지만 깨달음은 언제나 ‘너무’ 늦은 때에 찾아온다. 조금만 더 일찍 마음을 열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생각하지만 30년 전이나 3일 전이나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기는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