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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너머 Oct 22. 2023

뜨거운 태양 아래를 걷는 일

차 없이 살아보기

 헤아려보니 100일 정도 차 없이 잘 살았다. 그것도 이 뜨거운 적도의 태양 아래서 잘 걸어다니며.          

 한국을 떠나면서 차 없이 살아보려는 내 의지는 확고했다. 직장생활을 하던 삼십여년 동안  충청도의 작은 도시들을 대전에서 차를 운전하며 장거리 출퇴근을 했다. 아침 정해진 출근시간인 8시 30분까지 직장에 도착하기 위해 대전-당진간 고속도로를 경기에 출전한 카레이서처럼 달리던 날들이 부지기수였다. 이건 살기 위해 출근을 하는게 아니라 죽자고 하는 미친 짓이라는 생각을 하며 페달을 밟던 날들이 많았다. ( 이건 여담이지만 그렇게 미친듯이 페달을 밟고 있는 순간에 내 옆을 획 지나 순식간에 눈 앞에서 멀어지는 차들도 심심찮게 본 걸 생각하면 내가 미친듯이 밟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암튼 삼십여년 간 벌어먹고 사느라 내 몸에도 이 지구에도 많은 해를 끼친 자동차를 이젠 최소한으로 타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 좀 되었다.  게다가 난 육체적 힘듦에 무딘 편이고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니 이 기회에 실컷 걸어다니자는 생각으로 떠나오기 전까지 살짝 마음이 흥분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곳에 도착하여 조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생각한 더운 나라라는 것이 온도만 내내 더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모든 생활이 더위 때문에 굉장히 불편하고 특히나 걷기에는 최악의 상황이란 걸 실감하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실제로 이 곳에서는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다. 특히 한 낮에는 걷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그런지 도로 자체도 보행자를 일도 배려하지 않는다. 좁고 울퉁불퉁한 보행도로를 걷다보면 갑자기 앞을 가로막는 가로등이나 정체모를 구조물이 가로막고 서 있기 일쑤다.  심지어는 갑자기 인도가 점점 좁아지다가 아예  없어져 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차도로 걸어갈 수 밖에 없다. 다시 인도가 나타날 때까지.           


  매주 화,목 이틀간 영어 학원엘 다녔는데 집에서 빨리 걸으면 15분, 천천히 걸으면 20분쯤 걸리는 곳에 학원이 있다. 처음에 등록할 때만 해도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15분 20분이면 운동삼아 걷기 딱 좋은 곳이라 생각하며 걸어다닐 생각에 마음이 즐겁기까지 했다. 아침 9시부터 12시 까지 세시간 수업이라 아침에 아이 등교시키고 천천히 준비해서 여유있게 8시 반쯤에 집을 나와 학원에 걸어가기 딱 좋은 거리이긴 하다. 문제는 이 곳은 아침 9시면 이미 태양이 뜨겁게 머리위에 떠 있는 시간이라는 것, 학원에 도착하면 땀으로 온 몸이 끈적인다는 함정이 있다. 절정은 학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12시, 아침 아홉시보다 두 배 쯤 강렬하게 느껴지는 습기가 일도 안 느껴지는 짱짱한 땡볕 속을 걷노라면 햇볕에 노출된 종아리가 타는 듯 따끔거린다. 그랩을 타면 채 오분이 안 걸리고, 버스는 두 정거장 거리인데,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시간, 기다리는 시간, 내려서 다시 집까지 걸어가는 시간을 합하면 걷는 게 훨씬 빠르게 집에 갈 수 있다. 결국 비가 억수로 쏟아지지 않는 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사실 비가 오면 덥지 않아서 걷기에는 더 좋다.  그래도 걷기에 불친절한 보행도로도, 한 낮의 따가운 태양도 나 혼자서는 견딜만 했다.     

     

  차 없이 사는 데 가장 힘든 것은 내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다니다보면  차를 빌려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유혹을 정말 하루에도 여러번 받는 날이 한 두번이 아니다.       

  조금만 걸어도 물을 한바가지 뒤집어 쓴 것처럼 머리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아이를 보면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엄마, 친구들이 우리 엄마는 왜 차가 없냐고 물어봐, 엄마 돈 없어서 차 못사는 거야?" 라는 말을 들었을 땐 설명을 하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학교 등하교는 픽드랍 차량을 이용하니 문제가 없었지만 , 아이가 축구를 하러 갈 때마다 친구 차를 얻어타고 가게 되니, 처음 한 두번은 괜찮다가 일주일에 세 번이나 가게 된 요즘은 여간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차에 대한 고민은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나는 끝까지 버텨볼 요량이다.          

 

 다음 주말에 한국에서 동생과 방학을 맞은 조카가 페낭 공항에 도착한다. 차를 빌리기 좋은 이유가 생긴 것이다.  차를 빌리면 한 달간 이 섬을 샅샅이, 원없이 돌아다닐 예정이다. 그리고 한 달 후엔 미련없이 키를 돌려보내고 나는 홀젓하게 다시 걸어다닐 것이다. 아이 문제는 계속 고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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