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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어부들

낚을 것인가 낚일 것인가

by 정 호
우리는 무엇을 낚으며 살아갈 것인가.
또는 무엇에 낚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책 어부들은 낚고 낚이는 관계에 관한 이야기다.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무언가를 낚기 위해 애쓰거나 어떤 것에 낚여버린 존재들이다. 말 그대로 어부들인 셈이다.


주인공의 형제들은 어린 시절 집 근처에 있는 접근이 금지된 강에서 놀며 어부를 꿈꾼다. 중의적인 표현이 아닌 단어의 의미 그대로 어부가 되어 물고기를 낚아 함께 먹고사는 소박한 생활을 꿈꾸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아버지는 조금 더 원대한 꿈을 꾸었다. 자신의 자녀들이 동네 작은 강에서 물고기를 낚아 먹고사는 어부들이 아닌, 거대하고 원대한 꿈을 낚는 그런 어부가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조종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기술자가 되어 넓은 세상을 누비고 살아가기를, 아버지는 자녀들이 꿈을 꾸고 희망을 낚는 어부가 되기를 꿈꾸었다.


책 어부들에는 "아불루"라는 악인이 등장한다. 이 악인의 저주에 의해 한 가족이 파괴되는 과정이 어부들의 주요 스토리라인이다. 어부라고 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배다. 배에는 닻이 있다. 배를 정박시켜두기 위해서 닻을 내린다. 내려진 닻은 배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수단임과 동시에 배를 일정 범위 이상으로 움직일 수 없게 고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 보호를 위한 결계임과 동시에 제한을 거는 저주가 되는 셈이다. 아불루의 저주는 닻이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불루의 저주에 의해 프레임에 갇힌 삶을 살아가게 된다.


앵커링과 프레이밍

닻 내림 효과 혹은 앵커링이라고 하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이는 닻을 내린 이후 배가 일정 범위 이상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나 타인, 때로는 자신에 의해 정의 내려진 어떠한 언어나 생각에 의해 생각과 행동반경에 제약이 생기는 현상을 뜻한다. 예를 들어 "비 오는 날에는 파전이지"라는 문장에 앵커링 된 사람은 비 오는 날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파전 말고 다른 음식을 떠올릴 수 없게 되거나, "치킨에는 맥주지"라는 말에 앵커링 된 사람은 치킨과 와인, 치킨과 소주를 곁들이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게 된다. 이러한 사례만 조금 생각해봐도 곧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앵커링은 삶의 다양한 가능성과 폭넓은 시야를 제한한다. 책 "어부들"은 "비 오는 날에는 파전"이나 "치킨엔 맥주"같은 정도의 가벼운 앵커링이 아닌 조금 더 무섭고 어두운 프레이밍에 갇혀 허우적대다가 결국 그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장. 어부들. 우리는 어부들이었다.
2장. 강. 오미알라는 무시무시한 강이었다.
3장. 독수리. 아버지는 독수리였다.
4장. 비단뱀. 이켄나는 비단뱀이었다.
5장. 변신. 이켄나는 변신하고 있었다.
6장. 미친 사람. 아불루는 미친 사람이었다.
7장. 매부리. 어머니는 매부리였다.
8장. 메뚜기들. 메뚜기들은 선지자였다.
9장. 참새. 이켄나는 참새였다.
10장. 곰팡이. 보자는 곰팡이였다.
11장. 거미들. 거미들은 슬픔의 동물이었다.
12장. 수색견. 오벰베는 수색견이었다.
13장. 거머리. 증오는 거머리다.
14장. 리바이어던. 아불루는 리바이어던이었다.
15장. 올챙이. 희망은 올챙이였다.
16장. 수탉들. 형과 나는 수탉이었다.
17장. 나방. 나는 나방이었다.
18장. 왜가리들. 데이비드와 은켐은 왜가리였다.


재미있는 것은 책의 모든 챕터가 앵커링으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왜 독수리인지, 이켄나는 왜 비단뱀이면서 참새인지, 보자는 왜 곰팡이이며 오벰베는 왜 수색견이고 나는 왜 나방인지. 한두 챕터가 아닌 모든 챕터가 이처럼 어느 대상에 대한 정의로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는 분명 작가의 의도가 담겼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단순히 비유적 효과를 노리기 위한 표현이 아닌 주제를 보다 확실히 전달하기 위한 의도를 가진 정밀한 표현법이라고 봐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그 정의에 관한 설명을 듣고 수긍하게 된다. 이것이 언어의 힘이다.


첫째 이켄나는 아불루의 저주에 가장 강력하게 지배당한 피해자다. "어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는 한마디의 말은 이켄나를 결국 죽음으로 끌어당겼다. 아불루의 말대로 이켄나가 애초에 어부들에게 살해당할 운명이었는지, 그렇지 않다면 아불루의 저주의 말에 사로잡혀 이켄나 스스로 죽음의 지름길을 선택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이켄나의 삶의 마지막은 불행하게도 아불루의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너는 소심한 아이야. 너답지 않게 왜 그래."와 같은 말들은 아불루의 저주와 닮았다. 소심한 아이는 수많은 원인이 중첩된 결과일 때가 많다. 그 수많은 원인 중 일부가 바뀌거나 또 다른 원인이 새로이 중첩되어 쌓일 때, 소심한 아이는 대범한 아이가 되기도 하고, 용맹한 리더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이켄나가 되기도 한다. "너는 어떤 어떤 사람이야"라는 타인의 말에, 혹은 "나는 어떤 어떤 사람이야"라는 스스로의 말에 얽매여 결국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고야 마는, 기어코 저주의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야 마는 이켄나처럼 우리 역시 저주의 언어에 자신의 삶을 맡겨버린 채 휘청이며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주인공의 형제들이 다녔던 학교의 이름이 "아퀴나스 칼리지"인 것 역시 재미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을 바탕으로 신학의 체계를 세운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리스도교 철학을 설립한 사람의 이름을 딴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이 형제들의 미래를 암시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그리스도교의 중요 화두가 무엇인가.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다 결정되어 있으며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된다는 것 아닌가. 즉 운명론과 결정론이 그리스도교를 이루는 하나의 큰 축인 셈이다. 형제들의 학교 이름을 읽는 순간 불행한 결말이 예상되어 책을 읽기도 전에 죽음을 알아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게 되어버렸다.


언어의 덫, 앵커링의 저주에 걸린 사람은 비단 이켄나 뿐만이 아니었다. 둘째 보자도, 셋째 오벰베도, 넷째 벤자민도, 그리고 그들의 부모와 그 동네의 모든 주민들도, 아불루의 말을 곧 계시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모두 결정론적 세계관에 매몰되어버린 수동적 인간의 표상이다. 이는 진취적이지 못하다. 스스로의 삶을 가꿔낼 줄 아는 사람들이 아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는 허망함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은 비루하며 무능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슬프다. 그것이 2022년이라는 가장 현대적인 시간과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갖춘 선진국이라는 대한민국이라는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아불루는 무엇인가.


나는 어떤 것들로 정의 내려지고 있는가. 부모는 이래야 한다. 교사는 저래야 한다. 20대는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하며 60대는 또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하는가. 한국사회에서 남성은 어떤 존재여야 하며 여성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맡며느리는 누구이고 장남은 누구인가.


역할이라는 것은 사회를 떠받치는 중요한 축이 될 수 있겠지만 그 축을 지탱하고 있는 개인에게 있어서는 무거운 짐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불루의 저주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너는 어부들에게 죽게 된다"라는 아불루의 말을 무시하고 살았다면 이켄나는 살았을지도 모른다. "너는 어부들에게 죽게 된다"는 말에 사로잡혀 결국 이켄나는 어부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길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 선택하고 만 것이다.


외부의 프레이밍은 개인의 삶을 갉아먹는다. 이는 결코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정말로 개인의 시간과 자원과 에너지를 갉아먹어 증발시킨다. 그래서 외부의 정의에 의해 살아온 사람의 끝은 결국 후회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온갖 역할과 책임과 의무에 깔리고 남들이 정해놓은 정의에 맞춰 사느라 내 온 정성을 바쳐온 까닭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아불루의 앵커링에 우리는 어떻게 맞서야 할 것인가.


"너는 어부들에게 죽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벌벌 떨며 나를 죽이러 올 어부들을 기다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 것인가. 닥쳐라 이놈을 외치며 아불루를 찢어 죽여 내가 어떻게 될지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자기는 어떻게 죽을지 몰랐던 모양이네 하며 침을 퉤 뱉어줄 것인가. 남들의 정의는 필요 없다. 끊임없이 모든 단어와 생각과 질문에 스스로 정의를 내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15장. 올챙이에 가장 몰입이 된다. 맞서는 자와 순응하려는 자, 이 주제에 대한 나의 고민이 두 인물의 대립에 의해 구체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과거, 저주, 불행을 매듭지으려는 오벰베와 과거를 묻고 행복한 미래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벤자민의 대립 구조를 통해 우리가 불행한 과거 혹은 나를 가두려는 것들에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관찰자적인 시점에서 살펴볼 수 있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어부들은 결국 인생에 관한 이야기다. 살아간다는 것은 낚지 못하면 내가 낚이고야 마는 일이라는 것.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스로의 힘으로 낚아 올려야 한다는 그 무거운 교훈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무엇을 낚을 것인가. 제대로 낚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파도와 미치광이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낚으려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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