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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Aug 10. 2020

불안을 그리워하다

시티팝, 차원의 열쇠

최근 시티팝이라는 음악 장르를 알게 되었다. 80~90년대 일본의 경제 호황기 시절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도심의 세련된 느낌을 자아내기 위해 당시의 최고 연주자들, 가수들, 악기들을 활용하여 시대의 부흥을 자랑스럽게 표출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산뜻하고 경쾌한 느낌의 음악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시티팝이라는 장르의 설명만을 놓고 본다면 밝고 경쾌한 느낌이 주를 이룰 것만 같지만 가만히 듣다 보면 마냥 밝지만은 않은, 어떤 희미한 슬픔 비슷한 종류의 느낌을 섞어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만히 음악을 감상하던 중, 시티팝은 불안을 껴안은 그리움이 음악으로 형상화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지인으로부터 듣게 된 다음부터 시티팝과 불안, 그리움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행복하지만 행복하지 않고, 즐겁지만 공허하기도  그런 느낌,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정신없이 놀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갈 때 느끼는 감정, 주말 저녁 약속이 없을 때 불현듯 밀려오는 묘한 고독함, 이런 것들이 시티팝과 어울리는 감정이라는, 시티팝에 대한 지인의 정의를 듣고 음악을 다시금 들으니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내가 알지 못했던 것, 혹은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을 누군가가 언어로 정의한 것을 마주하게 되면 곰곰이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그러한 정의가 합당한가. 그러다가 합당하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면 나의 사고가 그의 정의대로 작동하게 된다. 시티팝의 정의를 듣고 난 다음 나의 사고 과정이 그러했다.


그러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리움과 불안, 공존하기 어려운 두 단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불안하면서 그리운? 그리운 것이 불안하다? 불안을 그리워하다? 어떻게 해석을 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 말이 되는 것도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불안이라는 것은 본디 부정적인 감정일 텐데 우리는 왜 그러한 음악을 찾아 들으며 불안을 그리워하며 다시금 그런 감정을 느끼려 하는 것일까. 


10대나 20대 초반이 시티 팝을 즐겨 듣는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들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한창 열정적인 어떤 시절을 지나,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거나 불안과는 한 발자국 멀찍이 떨어져 있는 삶을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시티팝을 들으며 불안을 곱씹고 있는 것을 본 적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불안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여기서 불안은 불안 자체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놀이기구를 탈 때처럼 불안하지만 설렌다던가, 짝사랑을 할 때처럼 불안하지만 장밋빛 미래를 꿈꿔 보는 것처럼 그것이 어떠한 방식이 됐건 미지의 영역과 조우한다는 설렘이라는 감정이 불안의 지분을 절반쯤은 차지하고 있는 것 같.


또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처럼 불안정한 미래가 두렵지만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골똘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던지, 나이와 상관없이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는 것과 같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밀도 있는 시간을 보냈던 사람이 그때의 불안을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불안을 그리워하며 시티팝을 듣는다는 누군가의 말속에서의 불안은, 설렘과 밀도 있는 시간과 함께했던 불안이라고 볼 수 있다.


성공한 연예인들 TV 나와서 나이를 먹다 보면 불안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 그들은 주로 오랜 기간 롱런하는 잘 나가는 연예인인 경우가 많으며 아마도 경제적 자유와 더불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며 손가락질할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는 공감의 하트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은 아직 안정기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면 아마 점차 안정적인 삶 속으로 한발 한발 걸어 들어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연예인들의 이야기와 시티 팝을 들으며 불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누구에게나 불안했던 시절은 존재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그 시절을 견뎌내거나 이겨내고 혹은 순응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시간에 대처해 보았던 경험이 있다. 지나간 것이라고 해서 모두 아름답고 다시 돌아보고 싶어 지는 것은 아니지만 시티 팝이라는 음악 장르는, 불안했지만 설레었었고, 가장 밀도 있었던 나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고 싶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 차원의 열쇠는 아닐까. 봄을 바라며 견뎌냈던 겨울 같은 시절은 지나 보니 늘 봄이었다는 어느 유튜버의 말처럼 우리는 겨울이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이 사실 봄이었다는 것을 시티팝을 통해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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