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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low snail Aug 22. 2023

도구의 진화는 나의 퇴화

"할아버지는 제게 자명종 같아요." 소년이 말했다. 

"내 나이가 자명종인 거지."     <노인과 바다 중에서>


오베는 평생 자명종이라고는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는 6시 15분 전에 눈을 떴고, 그게 그의 기상 시간이었다. <오베라는 남자 중에서>




나의 감각을 대신할 무언가가 있다. 

애써 감각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검지손가락만 몇 번 움직이면 내일 아침 기상시간에 맞춰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잠들 수 있다. 만약 자명종을 사용한다면 검지보다 많은 양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스마트한 세상에 맞춰진 몸은 편하다. 

감각의 촉수를 내밀어 감각해 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방향과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떠오른 해의 높이를 살필 필요도 없고, 구름의 모양을 보며 비가 올 구름인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옛날 사람보다 더 똑똑하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감각적인 면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모든 것이 기능화되어 대부분의 것들을 배울 필요가 없어졌다. 

오직 돈을 버는 방법만 알면 돈이 모든 것을 대신해 준다. 

요리를 배우고 요리를 할 필요가 없다. 돈을 벌어 사 먹는다. 바느질을 배워 바느질을 하는 건 시간 낭비다. 돈을 내고 세탁소에 가면 된다. 분업화하고 전문화된 사회는 이런 형태다. 나의 감각을 활용하여 무엇을 애써 배우고 성가시게 할 필요가 없다. 문득 장시간 사용을 멈춘 훌륭한 기능의 엔진에 녹이 끼어 더 이상 기능할 수 없이 되어 가는 것 같다. 


나의 엄마는 일을 하셨다. 일도 하면서 바느질부터 집안식구들의 하루 세끼를 책임지셨다. 

방학 동안 아이들의 삼시 세 끼를 책임지면서 엄마의 그 시절을 생각하며 감탄을 하곤 한다. 

쉬이 생각하기론 과중한 업무로 혹사당한 그 시절 여성의 삶이 떠오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엄마는 멀티태스킹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일상생활을 이루는 광범위하지만 꼭 필요한 자잘한 일들에 훈련되지 못해서 일상에서 막막할 때가 많다. 


입시공부가 불러온 부작용일 수도...^^;;

(공부만 잘하는 건 아니고, 공부만 하면 된다고 주입되어서..., 결국 공부도 잘 못하고 삶을 위한 많은 배움도 놓쳐버린 건 아닐까. 나라는 한 인간을 통해 돌아보게 된다.)


스마트폰을 5분 간격으로 세팅해 놓았는데도,

나도 모르게 끄고 잠들어 계획한 새벽 기상 시간을 놓쳐 버린 아침에,

기능하지 못하도록 세팅된 내 감각을 책 속 두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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