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세절기” 방이 유행한 적도 있었다. 아직 사람들이 기억의 고통 때문에 쩔쩔매던 어리석은 시절이었다. 동네 비디오가게가 흥하던 시기와 노래방이 유행하던 시기 사이쯤에, 반짝 흥행했던 가게였다. “기억 세절기” 가게는 요즘 보는 1인용 고깃집의 구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게 전체는 넓었지만 공간은 바둑판을 깔아놓은 듯 좁게 쪼개져 있었다.
가까스로 등받이가 있는 불편한 의자에 앉으면 양 옆으로, 양 옆을 가린 나무 판자가 보인다. 그리고 정면에는 뒤쪽에서 드라이아이스 같은 김이 몽글몽글 올라오는 기계가 있다. 정수기 비슷한 모양의 기계인데 물 꼭지 대신 전자파 발사 장치가 있었고, 사람 머리가 안쪽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설계돼 있었다.
흡연실에 앉은 사람들은 대개 기계 아래로 머리를 넣기 전에, 담배를 한 대씩 피웠다. 그곳에서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없었다. 줄담배는 이번 기억의 생에서 마지막 담배라는 멋을 잃게 하고, 낭만도 의지도 없는 별볼일 없는 중독자라는 낙인을 스스로 찍는 짓이기 때문이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나면 내면에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쓸쓸한 표정을 한 번 지은 다음, 사람들은 기계 아래로 머리를 넣었다. 그리고 조금은 볼썽사납게 팔을 뒤통수 위쪽까지 뻗어 “기억 세절기”의 버튼을 눌렀다.
처음엔 거의 구름 같은 짙은 김이 나왔다. 그 상태로 2분 정도가 지나면 드디어 기계가 장중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줄 두 개 정도가 끊어진 콘트라베이스 같은 소리였다. 기계는 1분당 0.5mm씩을 움직이며 목덜미에서부터 태양혈까지 사람의 머리를 완전히 훑었다. 그 과정이 끝나면 기계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은 사람의 기억의 세절이 끝난 것이다. 기억의 세절은 결코 기억의 상실이 아니었다.
기억의 세절이 끝나면 기계는 종료음을 커다랗게 냈고, 그러면 없는 것처럼 보이던 알바생이 나타났다. “기억 세절기 방”의 알바생들은 밖에서 휴대폰으로 친구와 수다를 떨거나 다리를 떨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게임은 금지였다. 인간의 기억이 세절되는 매우 신성한 곳에서 게임이라니 가당치 않았다. 알바생들은 기억의 세절의 끝난 사람의 겨드랑이를 붙잡고 지하에 있는 침실로 옮겼다. 기억이 세절된 사람은 혼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일어서 있었는지, 그러니까 뒷다리 근육에 어느 정도 힘을 실었었는지 발목의 방향을 어떻게 했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 없이는 어떤 일상생활도 할 수 없었다.
“기억 세절기 방”은 밤 11시까지만 영업을 했다. 밤 11시부터 자정까지의 한 시간은 오늘 그 가게에서 세절된 기억을 모두 모아 섞는 작업을 했다. 자정까지만 영업을 하는 이유는 고등학교 알바생들도 있었기 때문인데, 당시 청소년들은 자정 넘어 일할 수 없게 돼있었다. 세절된 기억은 전자통에 넣어져서 1시간 동안 마구 뒤섞였다. 경우에 따라 그 과정에서 수 조 개의 기억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수 조 개의 기억 정도는 태평양에 떨어뜨린 한 방울의 잉크처럼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자정이 되면 알바생들은 좀비 같은 사람들을 한 명씩 다시 “기억 세절기” 앞에 앉히고, 기계 속에 좀비의 머리를 넣고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다시 새겨진 사람들은 깨어났다. 같은 시간에 기억 세절 받은 사람들 중에 운 나쁘게 친구가 있었다면 그 친구의 부인이 내 부인으로 기억돼있을 수도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사람을 죽인 기억 때문에 양심의 고통을 받는 경우도 있다. 살인자의 기억이 들어온 것이다. 그 어떤 기억도 사람에겐 모두 현실이었다. 어쨌든 그처럼 더 악화된 상황들이 연출되는 경우도 흔했지만, 그래도 “기억 세절기 방”은 망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꾸준히 찾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이란 말도 있듯 “기억 세절기 방”의 인기도 3년을 채 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뒤로 노래방이 장장 10년 동안이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