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따따까이”는 밀가루만큼 작습니다. 그래도 현미경으로 보면 눈과 코, 입과 귀가 모두 달린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헌데 신비스러운 것은 “아따따까이”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따따까이”가 숨을 쉬었다면, 거의 무게가 없는 “아따따까이”들은 서로를 공중으로 날려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따따까이”들은 무리 지어서 다닙니다. 무리의 규모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단 한 마리가 다닐 때도 있고 수십 조 마리가 떼지어 다닐 때도 있습니다. 움직이는 것으로 봐서는 분명 생물이지만, 숨을 쉬지 않는 것을 보면 무생물입니다. 움직인다고 해서 꼭 생물로 봐야 하느냐, 반대로 숨을 쉬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무생물로 규정해야 되느냐에 대한 갑론을박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제가 이렇게 “아따따까이”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따따까이”가 먼저 제게 관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따따까이”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면, 그 사람 주변으로 몰려듭니다.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창가 주변이나 옷걸이가 없는 텅 빈 벽 같은 곳으로 말입니다. “아따따까이”들은 한 번 사람 주변으로 오면, 그 다음부터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자유의지로 그러니까 일부러 움직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일정시간 이상 멈춰서 있으면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인지, 어느 쪽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따따까이”에서 뻗어 나온 실처럼 가느다란 것을 뿌리라 불러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따따까이”는 따뜻한 존재들입니다. “아따따까이”가 얼마나 몰려들었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 10억 개의 “아따따까이”가 몰려들면 방의 온도는 1도씨 정도 올라갑니다. 10억 개의 “아따따까이”가 모이면 작은 창문 하나 정도 크기가 됩니다. “아따따까이”의 색은 시시때때로 변하지만 그 빛깔은 늘 곱습니다. 파스텔 풍의 늦은 봄날 저녁과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의 아다지오 악장 같은 분위기입니다.
벽에 붙은 “아따따까이”의 크기는 더 커지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합니다. 일종의 번식과 죽음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생물학자는 배설이 없는 생물은 존재하기 불가하다면서, ““아따따까이”의 배설은 번식이다”라는 이론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아따따까이”가 번식하고 죽어가는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세계 최고의 고속카메라들이 현재까지도 동원되고 있지만, 그들은 제 몸으로 번식하거나 죽는 것이 아닙니다. 갑자기 존재가 생겨나고 갑자기 사리지는 것입니다. 헌데 그 과정조차도 카메라는 담지 못합니다. 마치 “아따따까이”들이 우리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시간대에 살고 있는 듯이 말입니다. 하나 확실한 것은 그들은 서로 완전히 동일한 개체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치면 100%로 DNA가 일치하는 것입니다. 현재까지 이런 생물은 “솔레비아노” 밖에 없었는데, 두 번째로 “아따따까이”가 등장한 것입니다. “솔레비아노”는 수억 년 동안 자기복제를 해왔습니다.
저는 제 쪽으로 “아따따까이”가 온 날을 기억합니다. 그녀가 죽고 나서 1년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오며 처음으로 소주를 사봤습니다. 그것도 두 병씩이나. 한 병은 아예 열지도 못하고, 겨우 소주 서너 잔을 마신 후 저는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바닥에 “아따따까이”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어느새 다가와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아따따까이”가 왔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따따까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우한 사람들에게 몰려간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에게 너무 인기가 없어 평생 외롭게 살아야 할 사람이라든지, 불우한 사고로 소중한 가족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사람이라든지. 하지만 웬만큼 불우해서는 “아따따까이”가 몰려가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제삿날에 “아따따까이”가 내 근처로 왔다는 것은, 그녀의 죽음이 제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어젯밤 “아따따까이”는 바닥에서 이국의 풍차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어릴 적 봤던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 보던 그런 풍차 말입니다.
저는 지금 언젠가 저 “아따따까이”를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