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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돌이 나름 선생님 Oct 26. 2022

크리스마스 이틀 전의 두 소녀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 눈이 그만큼 펑펑 내린 적은 없었다. 광화문과 탑골공원 사이의 뒷골목을 우리는 걸어 다녔다. 때는 크리스마스 이틀 전인 12월 23일이었다. 다음날부터 붐벼질 것을 기다리듯이 거리는 한산했다. 한가한 가게에서 나와 밖에 앉은 점원들의 얼굴은 넋들이 조금 나가 있었다. 하얀 눈과 대비돼 밤하늘은 더욱 새까마면서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밤은 눈으로 세수를 하고 있었다.

 자정에 가까워졌을 때쯤 잠시 눈은 그쳤다. 달빛이 환했고 멀리 가로등 불빛도 반짝였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소음기 구실을 했는지 세상의 소리는 모두 빨려 들어가 우주는 고요해졌다. 우주에서 원래 지구만 시끄러운 곳이었다. 우리는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어느 가게 앞에 술에 취해 주저앉은 사람이 보였지만 우리는 서로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결국 내가 사진사 노릇을 자청했다. 미연과 하나가 프레임 안에 들어왔다. 카메라는 평소에 사진에 관심이 많던 하나의 것이었는데 녹슨 데들도 꽤 많은 구식이었다. 그때는 요즘처럼 사진 찍는 것이 유행하지 않던 때였다. 요즘의 사진들은 자꾸 뭔가를 나열 식으로 채우려고만 할 뿐,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는 아예 처음부터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중하지 않는 것들도 쉽게 잘라내지 못했다.

 나는 프레임 안의 크기를 넓혔다 좁혔다를 반복했다. 사진 안은 미연이와 하나로만 가득 찼다가, 금세 검은 겨울하늘과 눈밭, 그리고 어느 가게 앞 눈 덮인 쓰레기통까지 담겨지기도 했다. 자신이 찍혀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두 소녀는 아마 내가 카메라 조작에 미숙한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소녀들은 찡그린 표정 전혀 없이 처음 만났을 그때처럼 엷지만 사라지지 않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진 프레임 속에 미연이만 담겼다. 난 그때 그대로 버튼을 눌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아니 충동이라기보다는 그게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계속 망설였다. 물론 사진 한 장 찍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난 그조차도 쉽사리 내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없었다. 그때 미연이만 찍었더라면 지금 두 소녀와 나는 어떻게 됐을까? 언젠가 그날만큼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 오면, 난 다시 그날 밤의 자정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결국 사진 속엔 두 소녀가 공평하게 담겼다. 마치 내 기억의 프레임에서처럼.


우리는 광화문의 긴 횡단보도 앞에 섰다. 누가 내 손을 잡았고, 다시 다른 느낌의 손이 내 반대편의 손을 잡았다. 문득 철 없는 의문이 들었다. 누구의 손이 더 따뜻할까, 나는 누구의 손을 더 따뜻하다고 느낄까. 나는 세상 몰래 핵실험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혼자 초조해하며 거의 눈을 감고 두 소녀의 손의 따뜻함의 정도를 느껴보려고 했다. 답은 분명했다. 미연이의 손이 더 따뜻했다. 그리고 난 그 이유도 알았다. 미연이를 잡은 내 손이 더 따뜻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의 손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누가 보면 고작 그런 것에 눈물이 나니 싱겁다고 하겠지만, 내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미연 아닌 하나 때문이었다.  

 그날 원래 미연이와 나는 그녀가 살고 있던 신촌 쪽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하지만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하나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우리는 각자의 저녁 약속을 자연스럽게 깨버렸다. 원래 하나와는 그 다음날인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기로 했었다. 그리고 우리는 청계천을 지나 동대문을 지나 종로까지 걸어갔다. 당시 청계천은 물이 흐르는 곳이 아니었고 고가도로 아래로 동시상영 극장 간판이 보이던 때였다. 종로3가를 지날 때 나는 피카다리 극장에서 미연에게 종각에서 보자고 전화했다. 하나는 내가 눈을 걷어내 준 조금 떨어진 벤치 위에 앉아있었다.

미연은 하나와 내가 함께 나타났을 때, 그러니까 우리가 그녀의 프레임 안에 동시에 들어왔을 때 별로 놀라는 것 같지 않았다. 하긴 미연과 나는 굳이 따지자면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미연이 하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았는데, 둘은 처음 봤지만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다. 그런 물음과 확인 없이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간다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파란 불이 들어왔다. 열명 남짓한 사람들은 얼음을 깨고 나아가는 동물처럼 조심스럽고 두려운 표정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무엇을 걱정하는 것일까, 앞으로 겨울이 더 추워질까 염려라도 하는 것일까. 그녀들의 손이 내 두 손에서 빠져나갔다. 조금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옷깃을 여미며 앞으로 걸어갔다. 긴 횡단보도를 건널 때 빌딩의 넓은 이마에 붙어있는 광고판이 보였고, 제 이름을 알리는 신문사들의 붉은 글씨도 보였다. 꼭 바다에 잠겨 오래 전의 망한 세상 같았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우리는 함께 조금 더 걸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우리가 함께 걸은 길은 매우 짧았던 것 같다. 철도 역사박물관 앞에서였다. 먼저 하나가 걸어왔던 길 쪽으로 뒤돌아서 갔다. 작별인사도 어떤 감정 표현도 없었다. 그 다음엔 미연이가 신촌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누구 한 명 붙잡지 못했다. 혼자 남았을 때 어둠 속에 덩그러니 잠긴 철도박물관은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은 내야 했고, 누군가에서 비롯됐든 감정은 모두 나의 것이었다. 어디론가 움직인 것은 역사가 되고, 다시 역사의 역사가 되어 박물관 안에 갇혀 있었다. 때로 기억은 갇혀있을 때만 겨우 보존되었다. 나는 조금 전 소녀들을 찍었던 종로 뒤의 그 골목으로 돌아갔다. 미연이가 사진을 인화한다면, 내가 그렇게 찍을 수밖에 없었던 그 사진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감정이 어디에 이를 것인가는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하루 종일 너무 걸어서인지, 나는 한동안 의미 없는 아무 가게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때부터 내 세상에 함박눈은 다시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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