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삼청동이 유명해지기 전에, 나는 삼청동에 살았었다. 방 2개가 있고 좁은 마당까지 2층이 전세로 2천 5백만 원 할 때였다. 우리가 그날 독립문을 지나친 것은 내가 근처 삼청동에 살았어도 마침 8월 15일 광복절이었기 때문도 아니다.
우리는 그녀, 미라의 짝사랑을 쫓고 있었다. 일종의 미행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의 여름만큼 덥지 않았다. 미라가 손수건을 괜히 가져왔다는 말도 했었고 바람이 꽤 시원하게 불었던 것 같다. 국화 무늬의 치마를 입은 미라가 “종아리가 시원해”란 말이 아직도 생생하니까. 미라는 그 말을 잔디가 벽을 넘고 있는 돌담 길 앞에서 했었다.
미라가 좋아하는 선배와 그의 애인은 경복궁으로 놀러 가는 것 같았다. 우리는 퇴문 바로 건너편에 있는 카페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미라는 나와 대화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그때 짝사랑은 혼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듣는 음악과 같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카페에선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가 흘러나왔다. 괜히 머리 위의 나뭇잎 사이에 뭐가 있는지 봤더니 미라의 작은 어깨가 걸려있었다.
미라를 처음 본 것은 문과대 남자 화장실 앞에서였다. 나는 조금 실의에 빠진 채 교정을 걷다가 늦게 학사 안으로 들어오던 참이었다. 나는 잠을 자지 못했다. 굳이 불면증이라고 한다면 ‘평생 불면증’이란 이름을 붙여야 했다. 집에서 난 괴물 취급을 받았었다. 엄마는 아기 때부터 잠들지 않고 늘 동그란 눈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내가 무서웠다고 했다. 물론 엄마가 이모에게 하던 말을 초등학교 때 현관문 옆 담벼락에서 엿들었던 얘기였다. 내가 그날 실의에 빠져있던 것은 잠이 없기 때문에 남들보다 공부를 훨씬 많이 했음에도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달콤한 잠도 주지 않고 좋은 머리도 주지 않은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남자 화장실에서 여자가 나오더니 당황스러웠다. 미라의 얼굴은 붉어졌었다. 그 일 때문에 나는 미라와 2학년 여름이 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내게 쌀쌀맞게 굴었다. 물론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지만. 책을 잘 읽지 않는 미라는 모르겠지만, 일본 전후 소설가 이마세와 겐지가 쓴 『미라』란 소설이 있었다. 서문에는 프랑스 자연주의 소설가 에밀 졸라의 장편소설 『나나』와 『미라』가 상당히 유사한 데가 있다고 쓰여 있었지만, 그런 것에는 관심 없었다.
미라와 소설 속의 미라는 어딘가 닮아있었다. 나는 미라가 대단한 여자라서 좋아한 적은 없었다. 소설 속의 미라는 아닌 척 하지만 결국은 경박하고 상투적인 여자였다. 그리고 소설 속의 미라는 조금 야했는데, 나는 그렇게 내 멋대로 미라를 상상하여 혼자 얼굴을 붉힌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경복궁을 나온 그들은 가끔 마주보며 웃었고 과한 스킨십은 하지 않았다. 두 손만 꼭 붙잡고 다녔다. 그들은 인사동 뒤편의 버스정류장에서 섰다. 나는 그들이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선배는 평소에 침착한 편이었지만 과묵하진 않았고 미라의 친구이기도 한 그의 연인 역시 성격이 비슷해 보였다. 남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서도 역시 쉽게 비난하지 않는 사람들. 미라나 나 같은 이들보다는 격조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미라는 망설이다가 그들이 탄 버스에 서둘러 올라탔다. 다행히 그들은 빈 자리가 있어도 앉지 않았고 우리는 그들의 등을 지나 뒤쪽으로 갔다. 꽤 북적이고 있어서 얼굴 없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될 것 같았다. 그들은 명동에서 내렸고 남산 쪽으로 걸어갔다. 그날 남산 오르막길을 걸으면서 미라가 왜 하필 나를 지목했는지 궁금했다. 우리는 같은 과이긴 했지만 겉으로 봐서는 도저히 친한 사이라 할 수 없었다. 고작 내 머릿속에서만 난 그녀와 친했다. 난 괜히 말을 꺼내봤다.
“선배 참 멋있지?”
미라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리고 멀리 떠가는 케이블카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말이 없자 난 또 괜히 철학자연하는 말을 했다.
“처음인 것들은 꼭 다 흉내 같아. 전에 해본 적도 없으면서.”
“넌 참 나하고는 다른 사람 같아.”
선배와 미라의 친구는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와서는 독일문화원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미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벌써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케이블카는 마지막 손님을 받고 있었다. 벽 아래 쪼그리고 앉아있던 미라가 매표소로 갔다. 잠깐 나 혼자 있을 때 지나가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말했다. 터벅터벅 걸어가던 사람들 중 누가 한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이 지긋한 목소리였다.
“여자 친구 참 예쁘네.”
미라는 어둠 속에서 우두커니 반짝거리는 남산타워를 잠깐 보더니, 내게 표 한 장을 내밀었다.
“오늘 고마웠어. 선물이야.”
뜻밖이었다. 미라는 내게 한 번도 친절한 적이 없었다. 헌데 그 뜻밖의 친절이 내 가슴을 너무 아프게 했다. 나는 케이블카 안에서 어젯밤 수화기로 전해졌던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MT 갔을 때, 이상하게 선배한테만 새들이 모여드는 거야. 정말 신기했어.”
그날 밤부터 나는 잠이란 것을 자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내가 없었으면 하고 바랄 때가 가끔 있다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잠을 자기 시작했지만 특별히 일상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성적도 비슷했고 성격도 여전히 비슷했다. 미라는 다음 학기를 휴학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소설 속의 미라와 미라는 달랐다. 나는 미라가 선배를 욕하며 금세 다른 남자를 찾을 줄 알았는데, 그 뒤로 나는 미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없어지는 잠이란 것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