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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물고기 Jul 08. 2023

고통의 상상력

[밑미 리추얼 외면일기] 2023.07.07.

2023.07.07. 금요일. 맑고 더움


고통의 상상력


이십대 초반일 때, 개인적인 시름에 더해 다른 사람들의 고난 때문에 자주 슬퍼지곤 했다. 최저임금을 받고 400원으로 점심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이, 별안간 일자리를 잃고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받고 있는 대우 때문에 힘들었다. 아무것도 바꿀 힘이 없는 주제를 알았지만 적어도 누군가 함께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동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이름 없는 사회운동가였고 한때 정치범이었다. 그야말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았고, 남겨진 것은 연좌제와 자욱한 먼지 속의 생활 뿐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 삶을 결코 닮지 않겠다고, 나는 내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생각했다. 책임지지 못할 이상은 경멸하기로 했고 안전한 선택만을 했다. 나는 몸에 슬픔과 분노를 동력으로 바꾸는 효소를 분비하는 기관이라도 가진 것 같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태어난듯했고, 고통의 상상력에 부식되지 않도록 감정을 단속해야 했다.


오늘 출근길에 읽은 책은 어떤 시인이 쓴 에세이였는데, 여행지의 식당 밖에서 갑자기 어떤 거지가 목놓아 우는 것을 보았다는 대목이 나왔다. 이 대목을 읽다가 갑자기 마음이 뜨거운 것에 데인 것 같은 감각이 들어 잠깐 책에서 눈을 뗄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무엇이 그렇게 서러워 길에서 큰 소리로 울었을까? 식당 앞을 지나는 순간 배가 고픈 것이? 소중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들었을까? 아니면 익숙해진 가난이 새삼 한탄스러웠을까?


목놓아 우는 아이는 종종 귀엽지만 목놓아 우는 어른은 그렇지 않다. 아이는 솜사탕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이유로도 엉엉 울 수 있지만, 어른이 사회적 체면을 벗어두고 길에서 엉엉 운다는 것은 뭔가 심각한 슬픔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었던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백석의 <수라>를 가르치며 '시인은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도 슬퍼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라는 백석의 말을 알려주셨다. 그렇다면 시인은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고 자란 어른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화려하고 세련된 것들조차 모두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것 없이 느껴져 진저리가 날 때가 있다. 사라지는 즐거운 순간보다도 아프고 감미로운 슬픔을 느끼는 순간 때문에 살아있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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