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기 전 침대에 누워 가이드북을 넘겨보면서 음식 이름을 기억해두고 흥미로운 사진이 담긴 페이지를 접어두는 것에 마음이 설렌다. 종이 지도의 길을 짚어 가다 보면 작은 사진에 덧입혀진 상상 속의 거리가 3D로 나를 둘러싼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뒤 작은 침대 위에서 다시 꾸깃한 가이드북을 펼칠 때면 그곳의 거리와 공기가 더 선명하게 나를 감싼다.
싱가포르를 여행지로 택했을 때 여행 가이드북으로는 처음 보는 출판사의 책을 골랐다. 통통 튀는 표지 색감과 일러스트에 사로잡혀서 내용의 구성에 대해서는 판단이 흐려졌는데, 초보 여행자에게 필요한 정보들이 부족한 대신 다소 독특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다. 가령 아쿠아리움인 언더워터월드에 가는 방법 대신 상어와 함께 다이빙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는 식이었다.그리고 나는 그 상어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상어와 함께 다이빙'이라는 문구가 적힌 페이지를 접어두고 몇 번을 다시 펼쳐보았다. 그리고는 다이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언더워터월드 사이트에 들어가 영어로 쓰인 길고 긴 설명을 대충 무시해버린 채 프로그램을 예약했다.
다이빙하는 날 일반 속옷 위에 잠수복을 입을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중량 벨트를 차고 호흡 장비가 달린 공기통을 메고 나서야 오랜 시간 물 속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장비를 이용해 입으로 숨 쉬는 방법을 연습하고 '귀가 아프다', '괜찮다', '물 밖으로 나가고 싶다'를 의미하는 세 가지 수신호를 배운 후에 입수 장소를 안내받았다. 산소 발생 장치가 가득해 수산시장처럼 보이는 비밀스러운 공간에 사다리가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 물속에서 걷고, 물고기들에 둘러싸여 손을 뻗고, 아쿠아리움을 구경하는 관광객들을 향해 인어처럼 인사하는 경험들은 너무나 특별해서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토록 기대하던 상어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생각보다 작고 귀여워서 상어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만져봤을 때 피부가 조금은 거친 느낌이 들었던가. 상어를 붙잡아 건넨 다이버는 뿌듯해하며 웃었는데.
사실 상어를 만지는 동안 내 정신은 온통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잠수하는 동안 먹먹하게 귀가 아팠기 때문이었다. 호흡 장비를 입에 물고 있는 탓에 침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귀가 아프다'는 수신호를 보내도 효과는 잠깐이었다. 인솔하는 다이버가 한 명뿐이라 누구든 물 밖으로 나가려면 모두가 체험을 중단하고 같이 올라가야 했기에 '물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수신호를 보내지도 못했다. 고작 5m 남짓 내려간 물속에서 혼자 수압을 한껏 실감하면서 자연의 힘을 느끼고 있었다.아쿠아리움도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일부였던 것이다.
열여섯 번째 과학 유람, 수압
수압은 물의 무게에 의해 발생하는 압력이다. 아쿠아리움에 들어간 나를 둘러싼 물이 사방에서 누르는 힘을 느끼는 것이다. 사실 물 밖에서도 우리는 지구를 둘러싼 공기층에 의해 눌려 있는데 공기의 무게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기에 대기의 압력을 실감하지 못한다. 지구의 해수면 근처에서 측정한 대기층의 압력을 1기압이라 하는데, 물 속으로 들어가면 대기층이 누르는 1기압의 힘에 물이 누르는 힘까지 더해져 그 압력을 체감하게 된다.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를 누르는 물의 양이 많아지기 때문에 물의 깊이에 비례하여 수압이 커진다.
10m씩 수심이 깊어질수록 대략 1기압씩 수압이 증가한다. 5m 깊이의 아쿠아리움에 들어갔다면 0.5기압의 수압과 1기압의 대기압을 더해 총 1.5기압의 압력을 느낀다. 그렇지만 이것은 5m 깊이의 아쿠아리움 바닥을 딛고 있는 발가락이 느끼는 압력이다. 내가 서 있는 키를 생각해본다면 먹먹한 고통을 주는 귀 부분을 누르는 압력은 1.35기압 정도일 것이다. 내 몸 안쪽의 공기는 물 밖의 대기압과 비슷한 1기압의 힘으로 고막을 누르고 있는데 고막 바깥에서는 1.35기압의 힘이 가해지니 고막 안팎의 힘이 달라 아픔을 느끼게 된다.
고막 안쪽의 중이에는 목구멍을 향해 나 있는 유스타키오관이라는 가느다란 통로가 있다. 유스타키오관은 평소에는 닫혀 있다가 음식을 삼키거나 턱관절을 움직일 때 열려 중이와 인두의 공간이 연결되게 한다. 이를 통해 바깥 공기가 지나가는 인두와 중이의 압력이 같아진다. 귀가 먹먹하고 아플 때 하품을 하거나 침을 삼켜 해소하는 것은 유스타키오관을 열어 고막 바깥 외이와 고막 안쪽 중이의 압력이 같아지게 만드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다이빙 중에는 하품을 할 수도 없고 호흡 장비 때문에 침을 삼키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수압에서 벗어나기가쉽지 않다.
평소에 살아가던 세상과 조금만 달라져도 적응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세상을 알아가 보겠다며 여행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 여행책의 언더워터월드 페이지를 다시 펼치자 내 작은 방에 푸른 물이 가득 차올라 바람 소리마저 출렁거렸다. 그 안에서 나는 상어의 생김새는 온통 잊어버린 채 꿀꺽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