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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을 마치며 feat. 감각과 기억

여행이 끝난 후

by 여행하는 과학쌤
여행이 끝난 후


여행을 떠날 때 가장 비싸고 향이 좋은 바디워시를 챙기곤 한다. 낯선 하루의 끝을 위로받으며 그 날의 유람을 매듭지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매일 다른 숙소지만 같은 향을 맡으며 익숙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여행이 끝난 후에 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후 어느 퍽퍽하고 단조로운 하루의 끝에서 같은 바디워시를 꺼내 샤워를 하는 순간, 여행을 마친 방랑객들이 모여 있는 호스에서 씻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조금은 진이 빠지고 평범했던 하루가 아련한 기억으로 덮여 마무리된다.


여행할 때 듣던 음악도 기억을 보여준다. 10cm의 '10월의 날씨'를 들을 때면 이탈리아의 아씨씨라는 마을이 떠오른다. 특별할 것 없는 조용하고 작은 마을에서 정해진 목적지 없이 걸으며 보았던 벽돌집, 창문마다 놓인 붉은 꽃, 그리고 그 날 만났던 고양이가 눈 앞에 어른거린다. 로이킴의 '할아버지와 카메라'를 들을 때면 뉴질랜드의 낯설면서 한결같은 도로가 펼쳐진다. 하늘, 산, 초원, 호수...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시리게 아름다운 색이다. 비슷한 천국 속을 끝없이 달리는데 절대 질리지 않는 매혹의 천국이다.


어떤 날은 한국의 평범한 길 위에서 내 귀에만 소리 없이 노래가 재생되는 날이 있다. 행지에서 마주한 특별한 순간들이 떠올라 눈물이 날 것 같은 날이다.



마지막 과학 유람, 감각과 기억


떠나온 과거에 대해 무엇이 우리를 감상에 젖게 하는가. 뇌의 여러 부분 중에는 해마를 연상시키는 형태로 세포가 모여 있는 덩어리가 있는데, 장기적인 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해마가 손상된 사람은 손상 이후에 경험한 것들을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과 한 두 마디 대화를 나눈 후에, 대화 나누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다.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다양한 정보들은 해마를 거치는데, 신경 세포들의 연결 상태와 자극 방식에 따라서 정보들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할지 결정한다. 귀에서 인식한 음파 정보는 대뇌의 옆쪽 덩어리인 측두엽에서 처리된 후 해마로 보내지며, 눈에서 인식한 색깔, 명암 등의 정보는 대뇌의 뒤쪽 덩어리인 후두엽에서 처리된 후 해마로 보내진다. 어떤 풍경을 바라보며 특정 음악을 반복해 듣는다면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를 함께 처리하면서 신경 세포들이 연결된다. 그 음악을 다시 들을 때 이 연결이 자극되고 변화하기 때문에 음악을 듣던 풍경에 대한 장기 기억이 함께 떠오르는 것이다.


코에서 향을 유발하는 기체 분자를 인식할 경우에는 대뇌 안쪽에 위치한 변연계에 속해 있는 후각 시스템으로 정보가 전달된다. 변연계에는 감정 처리에 관여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특정한 향기는 그 향과 관련된 감정에 대한 기억을 불러올 수 있다. 잊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담은 수많은 향수와 함께 한다면, 여행이 끝난 후에도 의연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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