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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유람 feat. 금속의 산화 환원

내 손목 위의 화이트 에펠

by 여행하는 과학쌤
내 손목 위의 화이트 에펠


여름철 에펠탑을 받치고 자란 잔디 위에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흐른다고 한다. 각자의 일상 이야기와 파리의 낭만 이야기, 그리고 새롭게 싹트는 사랑 이야기. 그 이야기들 사이로는 순간의 요행을 노리며 물건을 강매하는 사람들도 지나다닌다.


한겨울의 찬바람이 휘몰아칠 때 찾아간 에펠탑은 몹시 쓸쓸해서 사람들의 낭만을 상상하기란 어려웠다. 하루에 딱 한 번 새벽 한 시, 에펠탑의 불이 꺼지기 직전에 오늘의 이야기를 비워내듯 탑을 둘러싼 전구가 하얗게 반짝린다고 한다. 화이트 에펠을 기다리고 싶었지만 파리의 겨울밤은 춥고 외롭고 위험했다. 탑 주위를 두어 바퀴 도는 동안 노숙하는 사람과 자꾸만 눈이 마주쳤다. 스마트폰과 지갑이 들어 있는 가방이 묵직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음번 파리 여행은 여름철을 택하리라. 아니면 새벽까지 화이트 에펠을 같이 기다려줄 누군가와 함께 다시 오리라.


얼굴을 때리는 찬 바람을 흘려보내며 공원을 빠져나오는 등 뒤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가방을 꼭 여며 쥐고 눈동자를 굴리자 체격 좋은 흑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광장 앞에 누워있던 노숙인은 아니었지만, 파리의 관광명소에서 숱하게 들려오는 흉흉한 이야기들이 머리 위로 따라붙었다. 갑자기 다가온 흑인이 재빠르게 팔찌를 채워주고 값을 요구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코트 주머니 깊숙이 손목을 찔러넣느라 마주 웃어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와 몇 마디 주고받으며 몇 번의 무단횡단을 함께 하는 동안 경계심이 다 풀려버렸다. 팔찌를 강매하러 다가온 줄 알았다고 솔직히 말하며 사과를 건네자 그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미소였다.


다음날에는 이른 아침부터 에펠탑으로 향했다. 지난 밤 움추린 가슴으로 르게 지나쳤던 거리는 평범한 빵 냄새가 맴도는 주택가였다. 파리에서의 아침 식사로 꼭 먹고 싶었던 바게트 빵을 베어 물며 에펠탑 앞에 다시 서자 웃음이 났다. 열쇠고리와 자석 따위를 주렁주렁 들고 가격을 흥정하는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팔찌를 꼭 사고 싶었다. 에펠탑 위로 올라가서 바라본 센 강의 모습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릿하지만, 분명한 건 기념품 상점에서 마음에 쏙 드는 은팔찌를 골랐다. 팔찌에는 에펠탑과 개선문 미니어처가 매달려 있었다. 그날 밤에는 화이트 에펠을 보러 가지 않았다. 에펠탑은 내 손목 위에서 이미 반짝이고 있었으니까.




열세 번째 과학 유람, 금속의 산화 환원


여행 내내 끼고 다니던 팔찌의 존재는 금방 잊혀졌다. 한국에 돌아온 뒤 낡은 파우치 안에서 잠든 에펠탑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팔찌를 기억해낸 건 금은방에서 은 세척제를 한 통 사면서였다. 은이 포함된 반지와 목걸이를 모두 꺼내면서 지저분하게 빛을 잃은 에펠탑 팔찌를 찾았다.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도 있었다. 팔찌가 은 제품이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은은 반응성이 낮은 금속이다. 금속 원자가 전자를 잃고 양이온이 되려는 경향을 금속의 반응성이라 한다. 반응성이 큰 금속은 쉽게 전자를 잃고 이온이 된 후 산소 등 다른 물질과 결합하면서 부식되거나 변색된다. 오래된 철 갑옷이 빨갛게 녹스는 것도 철이 전자를 잃고 산소와 결합하여 붉은 산화철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은은 철보다 반응성이 작아서 쉽게 녹슬지 않는 귀금속이지만, 황 화합물에 노출되면 시커먼 황화은을 형성한다. 전자를 잃은 은 이온이 황 이온과 결합하는 것이다.


까맣게 변색된 은 제품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려면 은 이온에게 다시 전자를 제공하면 된다. 변색된 은을 은보다 반응성이 큰 금속과 반응시키면 은 이온이 전자를 얻을 수 있다.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물질 중 알루미늄은 철보다도 반응성이 큰 금속이다. 변색된 은을 알루미늄 호일과 함께 소금물에 넣고 끓인다. 소금물에 녹아 있는 이온들은 전자가 잘 이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소금물 속에서 알루미늄이 전자를 잃고 알루미늄 이온이 되는 동안 은 이온은 그 전자를 얻어 반짝반짝 빛나는 은으로 돌아온다.


은 세척제에는 전자를 제공해주는 물질과 함께 반응을 촉진하는 촉매제가 들어 있기 때문에 빛을 잃은 까만 은을 넣으면 몇 초 내로 반짝이는 은을 되찾아준다. '두껍아 두껍아 헌 은 줄게 새 은 다오' 노래를 흥얼거리며 에펠탑 팔찌를 세척제에 넣었다. 파리는 팔찌로 나를 속인 적이 없었다. 그날 밤 보지 못했던 화이트 에펠처럼 별안간 팔찌에서 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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