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지도에는 그 날의 햇살과 구름의 빛깔이 물들어 있다. 종이 시각표에는 그 날 정류장에서 불어오던 바람 냄새가 묻어 있다. 작은 반도체 칩 속에 세상 모든 것이 담겨 있지만 여전히 나는 무거운 종이가 좋다. 특히나 여행지에서는 인터넷을 이용하지 않는 편이다. 네모난 화면을 향해 길을 묻는 대신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가끔은 길을 잃고 헤매다 마주친 골목길의 작은 카페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나만의 시간에 잠겨 유영하는 것이 좋았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고집스레 유지하던 여행 방식을 내려놓았던 것은 캄보디아에 갔을 때였다. 새벽 4시에 만난 툭툭 기사는 앙코르 와트에 내려주면서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아무 때나 나오라고 했다. 까맣던 배경이 보라색과 남색을 지나 흔히 알던 아침의 하늘 색이 되는 동안 사원의 틈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사원의 그림자가 형태를 갖춰가며 햇살 자락과 함께 물에 비쳤다. 사물을 또렷이 구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무 때나 나오라던 툭툭 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나무 그늘마다 수십대씩 놓인 툭툭이 틈을 헤매다가 우연히 만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오후에는 우연에 기대지 않고 전기자전거를 빌리기로 했다. 캄보디아의 뜨거운 열기가 묻어 있는 종이 지도와 자전거 열쇠를 손에 넣자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렇지만 마음처럼 무탈히 흘러가지는 않았다. 전기자전거에서 몇 번 균형을 잃자 주인이 단호한 태도로 렌트를 거절했다. 결국 다시 툭툭이를 타고 일몰 명소로 향하는데, 심지어 폭우가 쏟아졌다. 툭툭 기사는 곧 그칠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도착한 프레 룹에는 관광객도, 툭툭이도, 검표원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분홍빛 사원의 성소에서 비구름의 색을 지켜보는 것은 꽤 애틋한 경험이었지만, 시내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하루 대여비보다 비싼 값을 주고 툭툭 기사와 함께 되돌아왔다.
둘째 날부터는 인터넷 없이 여행하겠다는 고집을 버렸다. 유심칩을 사서 툭툭이를 부를 수 있는 패스앱을 깔았고 수월하게 유적들을 찾아다녔다. 이동 수단이 불확실한 장소에서는 사전에 계획을 잘 세우거나 인터넷을 신청하는 편이 좋았다.
열한 번째 과학 유람, 풍화 작용
밀림 속에 수백 년 간 잠겨 있던 앙코르 유적들은 비바람 속에서 일부가 떨어져 나가거나 식물과 한 몸이 된 형태로 오랜 시간 풍화 작용을 받고 있었다. 풍화란 암석이나 건축물이 분해되는 과정을 말한다. 부드러운 흙을 깊이 파내려가다 보면 돌조각들이 점점 많이 관찰되다가 결국에는 커다란 암석이 등장한다. 오래 전 그곳에는 아마도 단단한 암석만이 존재했으리라. 이 암석이 긴 시간 동안 잘게 부서지면서 겉표면에 토양이 만들어지는데, 빗물에 녹아든 물질이나 생물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물질에 의해 토양이 점점 비옥해진다. 앙코르 유적과 같은 건축물도 오랜 기간에 걸쳐 부서지면서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 과정에 일조한다.
특히 앙코르 유적은 프랑스 고고학자들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수백년간 누구도 찾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기 때문에 온갖 식물들이 뿌리를 내려 풍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물, 바람, 열, 식물 등에 의해 물리적으로 암석의 틈이 벌어지면서 쪼개지는 것을 기계적 풍화작용이라 한다. 암석을 이루고 있는 다양한 광물들이 온도에 따라서 수축하고 팽창하는 정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캄보디아의 뜨거운 낮과 시원한 밤을 반복해서 보내는 것만으로도 암석에 틈이 생길 수 있다. 바람에 날려온 식물의 씨앗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뿌리를 뻗는다면 식물이 자라면서 더욱 틈이 벌어져 빠르게 부서지는 것이다. 열대 기후인 캄보디아에서는 식물이 자라는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부서진 유적 사이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 울창한 나무들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식물들이 만들어내는 물질들의 영향을 받아서 화학적으로도 유적이 분해될 수 있다. 산소, 빗물, 생명체의 체액 등과 화학 반응을 하여 암석을 이루는 알갱이의 성분이 변하는 것을 화학적 풍화 작용이라 한다. 녹슨 철이 부식되듯 암석에 포함되어 있는 금속들이 대기 중의 산소를 만나 산화물을 형성하면서 부서지거나, 약산성을 띠는 빗물과 반응하여 암석이 녹는 현상들은 모두 화학적인 분해 과정이다. 식물 역시 산성 화합물을 방출해 암석을 녹이기도 하는데 특히 낙엽이나 열매가 썩을 때 발생하는 유기산이 암석과 화학 반응을 하는 주된 물질 중 하나이다.
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물질을 투여하더라도 자연의 느린 움직임을 완전히 멈출 수는 없다. 캄보디아에서 인터넷 없이 다니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된 먼 미래에는, 앙코르 유적이 제 모습을 잃고 모두 풍화되어 바닥의 토양으로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생생한 고대 크메르 제국에 들어가 있는 동안 디지털 칩이 때때로 메세지를 전해 나를 한국의 현실로 데려다 놓곤 했다. 나무와 사원이 기이하게 만나 둘인 듯 하나인 듯 경계가 모호해진 구조물들을 바라보며 나는 현실과 꿈결의 테두리가 만나는 그 어딘가 즈음에 걸터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