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국적기를 타면 두 시간 사십 분, 러시아 항공기를 타면 두 시간이 걸린다. 국적기로는 북한의 영공을 지나가는 최단 경로로 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번 여행은 러시아 항공기다. 비행기에서 내려 시내 버스를 타려고 마구 달리다가 한국인 H를 만났다. H는 같은 비행기의 통로 건너에서 나를 봤다고 했다. 러시아인들에게 둘러싸인 짧은 비행에서 태평하게 곯아떨어져 머리를 꾸벅거리는 나를 보고 프로 여행러라고 생각했단다. 같이 이동하면 시내에 무사히 도착할 것 같아 따라서 뛰었다며 웃었다. 우리는 함께 등대를 보러 가기로 했다.
특별한 것을 담고 있는 등대는 아니었지만, 시내의 단조로운 건물들보다흥미로울것 같았다. 러시아의 건물에는 쇼윈도가 없기 때문에 문이 보이더라도 들어가도 될지 망설이게 된다. 문을 열면, 도라에몽의 '어디로든 문'처럼 느닷없이 화려한 상점이나 카페가 펼쳐질 때도 있고, 은행이나 대학교 사무실이 나오기도 했다. 여행자에게 친절하지 않은 거리가 차갑고 낯설어서, 바다로 향한 것이다.
60번 버스의 종점에서 내려 바다로 난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한국에서 왔지요?" 한국말이 분명했지만 이질적인 억양의 질문이 날아왔다. 길가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인부였다. "서울에서 왔지요?" 두 번째 문장 역시 질문 자체로 무언가 생경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서울에서 왔냐는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우리는 비슷했지만 달랐기에, 그가 나를 알아본 것처럼 나 역시 그의 국적을 알아차렸다.'북한 사람인가?'
가장 높은 직책인 듯한 인부가 동행인 한 명과 함께 다가왔다. 북한에서 왔다고 밝힌 그는 우리의 여행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서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비행기 값을 듣더니 놀랐고, 월급은 그것의 열 배 정도라는 것에 탄식하듯 놀랐다. 북한에도 스마트폰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삼성에서 만든 스마트폰에 관심을 보였고,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82를 누르고 전화번호를 누르는 간단한 일. 따르르릉. 미지의 곳을 궁금해하는 형체 없는 마음이 흘러 실체를 가진 무엇인가로 연결되었다.
밀물이 들어오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H와 나는 등대를 향해 계속 걸어갔다. 짧은 대화가 끝났음을 알리듯 등대까지 연결된 길이 물에 잠기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걷다 보니 뼛속까지 쨍하게 차가워졌다. 계곡물이 아닌 바닷물의 온도가 이렇게까지 차가울 수가 있었나. 차디찬 바닷물을 찰박이며 걷다가 아린 발을 동동거리며 겅중겅중 뛰었다. 노을 지는 바다의 색은 따뜻했지만 정강이까지 차오른 물은 시린 온도였다.
아홉 번째 과학 유람, 해류
노을 지는 등대 밑에서 냉랭한 바닷물에 발을 담근 채 동해바다와 독도를 떠올렸다. 독도를 포함한 동해에는 차가운 해류와 따뜻한 해류가 교차하는 수온 전선이 분포하고 있다. 해류란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바닷물의 움직임을 말한다.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서 지구를 둘러싼 대기층도 일정한 방향으로 순환하게 되는데, 이때 만들어지는 바람에 의해 바닷물이 흘러 표층 해류가 만들어진다. 해류는 지구 전체를 순환하면서 열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지구의 기후를 유지하는 것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저위도 지방에서 고위도 쪽으로 흐르는 따뜻한 해류를 난류, 고위도 지방에서 저위도 쪽으로 흐르는 차가운 해류를 한류라고 구분짓는다.
저위도로 흘러가는 한류와 고위도로 흘러가는 난류는 중위도 지방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는데, 성질이 다른 바닷물이 만나는 경계면을 해양 전선이라 한다. 동해에는 이렇게 수온 전선이 넓게 형성되어 있는데 한류성 어종과 난류성 어종이 함께 서식할 수 있기 때문에 생물 다양성이 높은 생태계가 갖추어진다. 게다가 온도가 다른 바닷물이 만나면 비교적 밀도가 큰 차가운 물이 아래로 내려가고 밀도가 작은 따뜻한 물이 위로 올라가는 수직적인 흐름도 발달하게 된다. 가라앉아 있던 영양 염류가 섞이고 미생물이 번식하면서 어장이 더욱 풍성해진다.
달달 외울 만큼 익숙한 내용이지만 블라디보스토크 등대 앞의 차가운 바닷물에 발을 담가보기 전까지 난류와 한류는 머릿속에 형체 없이 글자로만 박혀 있는 지식일 뿐이었다. 우리나라 주변의 바다는 대부분 필리핀 부근의 저위도에서 흘러오는 따뜻한 난류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계곡물처럼 시리게 차가운 바닷물은 상상하기 힘들다. 러시아 부근의 고위도에서 북한 쪽으로 흐르는 차가운 한류가 내 다리를 휘감았을 때에야 비로소 북쪽 어딘가에 찬 바닷물이 흐르고 있었구나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형체 없는 마음들이 흘러 뜻하지 않은 순간 실체를 가지고 만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