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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유람 feat. 석회층

어떤 찰나를 담은 물놀이

by 여행하는 과학쌤
어떤 찰나를 담은 물놀이


물이 있는 곳이라면 사족을 못 쓰곤 한다. 내 여행 가방 한 켠에는 몸을 띄워줄 비치볼이 항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느 곳에 가든 개울이라도 찾아내어 물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러니 터키에 갔을 때 파묵칼레는 정말이지 필수 코스였다. 어디선가 찾은 파묵칼레 사진에는 구름처럼 몽실해 보이는 절벽이 희게 빛났고, 그 사이로 터키의 하늘을 담은 물이 있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파묵칼레 근처에서 숙박하는 일정을 욱여넣었다. 한낮에 숙소를 나와 빙하처럼 하얗게 반짝이는 파묵칼레를 향해 걷는 동안 온몸이 땀에 젖어갔다. 빛을 받아 부서지는 절벽층에 가까워졌지만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물놀이부터 해야 했다.


파묵칼레의 북문 쪽에는 오랜 세월을 품은 수영장이 있다. 지진으로 무너진 히에라폴리스 유적 위로 온천수가 뿜어져 나와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몸을 담가온 곳이라고 한다. 누군가는 좁고 지저분한데 턱없이 비싼 수영장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수천 년의 시간이 담겨 있는데 어떻게 깨끗하길 바랄 수 있을까. 고대 신전 사진에서나 보던 고전적인 양식의 기둥들이 여행객의 땀이 섞인 온천수 바닥에 두서없이 깔려 있었다. 누워있는 기둥 곳곳에는 이끼가 끼어 있었고, 무너진 유적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에 수영장의 깊이도 제멋대로였다. 어떤 축대 위로 올라서면 무릎 높이에서 물장구를 칠 수 있었지만 어떤 기둥을 넘어서면 발이 쑥 빠져버려 꼬르륵 잠겨서 물을 먹기도 했다. 내 기준에서 이보다 경이로운 수영장은 본 적이 없었다.


파묵칼레의 자연유산인 하얀 석회층도 경이롭기는 마찬가지다. 모래사장 근처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곳곳이 일렁이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는 암석이다. 태양빛을 강하게 받는 곳은 폭신하게 쌓인 눈처럼 빛나는데 밟아보면 발바닥이 아프도록 뜨겁고 단단하다. 그 암석 사이사이에 이 기이한 땅을 만들어낸 온천수가 고여 있다. 뽀얗게 혼탁하여 깊이가 가늠이 되지 않는 웅덩이 바닥에 채 굳지 않은 석회가 점토처럼 깔려 있었다. 빛에 따라 푸르기도 하고 하얗기도 한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가 나오면 팔다리에 석회 가루가 쌓여 하얀 꽃무늬가 피어났다. 고대 수영장의 온천수를 마신 내 뱃속에서도 긴 세월을 품은 꽃이 피었을지도 모르겠다.



여덟 번째 과학 유람, 석회층


석회는 칼슘을 포함한 무기 화합물을 뜻한다. 석회가 들어 있는 물이 공기 중의 이산화 탄소와 만나면 칼슘 이온과 탄산 이온이 결합해 탄산 칼슘이 생성된다. 하얀 탄산 칼슘은 물에 녹지 않기 때문에 물을 뿌옇게 만들다가 바닥에 가라앉는다. 석회수인 수돗물을 끓이면 바닥에 하얀 침전물이 남곤 하는데 이것이 바로 석회와 이산화 탄소가 반응한 탄산 칼슘이다. 석회가 없는 우리나라의 깨끗한 수돗물을 떠올린다면 언뜻 그려지지 않을 수 있다. 탄산 칼슘은 분필의 주재료 중 하나이니 분필을 녹여 뿌옇게 변한 물을 상상해본다면 파묵칼레에 고여 있는 웅덩이와 비슷한 모양새일 것이다.


웅덩이를 감싼채 층층이 빛나고 있는 파묵칼레는 석회 성분을 품은 따뜻한 온천수가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렸던 흔적이다. 온천수의 탄산 칼슘이 과거의 길을 따라 퇴적되어 신비로운 형태의 석회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물의 흐름에 따라 퇴적되었기 때문에 파묵칼레 곳곳에는 금도 물결치는 듯 무늬가 일렁인다. 물과 함께 운반된 광물은 처음에는 유동적으로 움직이지만 깊은 물 속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이고 굳어지면 과거의 모습 그대로 단단해진다. 파묵칼레는 먼 옛날부터 차곡차곡 쌓인 거대한 지층인 것이다.


석회암과 같은 퇴적암들은 과거를 열어준다. 퇴적물이 암석화되는 동안 오래된 어떤 순간들이 단단하게 보존되는 것이다. 잘 간직된 과거와 현재가 만나면 바람이나 물결과 같은 그 옛날의 주변 환경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화석처럼 당시 살고 있던 생물의 흔적 꺼내 보여주기도 한다. 먼 옛날의 평범한 순간들이 특별한 유산으로 다가온다. 히에라폴리스의 고대 수영장 속에 잠들어 있던 유적을 통해 평범한 여행객의 찰나가 머나먼 과거와 연결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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