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연아 선수의 팬이다. 사실 열광적이라기보다는 소소한 마음에 가까워서, 정의를 따지고 들자면 다소의문이들지만, 아무튼 자칭 팬이다. 중학교 때부터 김연아 선수를 응원하며 자랐고, 선수 생활 은퇴 후에는 팬미팅이 포함된 아이스쇼에 가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또래가 한 나라의 대표로서보여주는 정신력도 존경스럽고, 음악과 철저하게 맞춘 표정과 동작이 압권이라서 경기 막바지쯤이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김연아 시대" 이후로 피겨스케이팅에서 예술적 측면이 상향 평준화된 것이 사실이니까.
폴댄스의 어떤 동작들은 피겨 경기에서 보던 모습과 꽤 닮아있다.비록 진짜 내 모습은 피겨 선수들과 천지차이일지라도, 폴 위에서 팔다리를 뻗는 동안 상상 속의 나는 제2의 김연아다.
점프나 스핀에 앞서 피겨 선수들은 팔다리를 길게 뻗었다가 접는다. 사지를 움직이는 외력에 의해 회전이 시작되고, 뻗은 사지를 몸통 쪽으로 가져오면 회전 속도가 빨라진다. 물리책에서 배우던 회전 관성에 의한 것으로, 폴댄스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폴댄스는 봉이 도는 거야? 몸이 도는 거야?"
정답은 둘 다이다.
폴댄스의 철봉은 버클을 이용해 고정시킬 수도 있고,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풀어둘 수도 있다. 폴을 고정시킨 채 몸을 움직이는 기술은 기계체조와 유사하다. 달려오는 힘이나 반동을 이용해 고정된 봉 주위를 짧게 돌며 기술을 선보이는 것이다. 반면 폴 자체가 돌아가는 스피닝폴 기술에서는, 처음에만 외력을 준 후 돌아가는 봉에 몸을 맡긴다. 폴이 돌아가는 동안 팔다리를 넓게 펼쳐서 속도를 늦추기도 하고, 폴 가까이로 몸을 붙여 속도를 올리기도 한다. 가끔은 다리를 휘둘러 회전을 만들어낸다.
기본적으로 스피닝폴이 고정폴보다 빠르기 때문에 힘을 덜 들이더라도 더 화려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학원에서 소문난 쫄보. 스피닝폴의 특성을잘 활용하려면 빠르게 폴을 돌려야 의미가 있는데, 조금만 회전이 빨라져도 덜컥 겁이 난다. 옆에서 선생님이 지켜보기에 한없이 느리다는데, 나 혼자 "안 돼요!무서워요! 떨어질 것 같아요!" 3단 콤보를 외친다.
결국 나에게 남아 있는 모든 폴댄스 영상은, 남이 보면 지루한 움직임이다.굼벵이 중에 제일 빠른 편,뭐 그런 느낌인 거다. 어쨌든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고, 내 재주는 꾸준함이다. 느리게 느리게 돌다 보면 제2의 김연아는 못 되어도 잘난 매미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