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작성한 후 서랍에 보관해놓고 발행하지 않았던 글. 다시 읽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이런 일이 있었어? 이런 생각을 했어? 이 생각은 왜 한 거지 ㅎㅎ 등등... private 한 이야기가 많다. SNS상의 완전히 다른 자아로 이 공간을 꾸렸어야 했는데 같은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올해의 영화, 배우, 음료, 군것질, 깨달음, 캐릭터, 희망, 카페, 한숨, 문구, 어그로, 와인, 극호, 바람, 소비, 시, 목소리, 잘한 결정, 한마디, 문제의식, 글 등은 끄적였으나 매듭짓지 못하여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잘 모르겠다.
지금 시점에서 다시 읽어보니 1-2월의 경험이 집중되어 있고, 3-12월은 새로운 삶의 환경에서 대체로 단조로웠구나 같은 생각도 든다.
https://www.youtube.com/watch?v=U3u4pQ4WKOk
올해의 만남 : 연초의 G학회 모임 / 연말의 H학회 홈커밍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때의 친구들을 만났다. 각자의 길을 걸어 나가는 와중에도 생각하는 것만으로 힘을 주는 존재들이 있다. 누군가와 친해지고파 취향을 따라가기도 했고, 온갖 세상일과 우리에 대해 떠들었고, 곁에서 좋은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공동체라는 것에 대해서도 참 많이 생각했었다. 어제 만남에서는 반갑고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외계어를 남발했다. 술이 참 달았던 것에 대한 대가는 사랑니 뽑은 자리의 아픔으로 돌아왔지만 모쪼록 행복했다. 며칠 전 우연히 효창공원에서 만난 학생들은 기도 제목을 적어달라고 말했다. 내가 끄적이자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제안했다. 새해에는 사람들이 보다 행복했으면 좋겠다. 각자의 길에서 한 뼘만큼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올해의 못다 이룬 꿈 : 다른 사람이 보다 잘 기억하는 각자의 과거, 다음 모임의 컨셉
한 해 사이에 생긴 큰 변화 : 사람, 술, 이야기를 좋아합니다.라고 적었다.
어느새 잘 모르겠다.
올해의 의문 : 곳곳에서 들려오는 "글쎄", "난 잘 모르겠어", "애매해", "어렵지", "쉽지 않아"의 말.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와 별개로 우리 사이의 간극 때문에 주저하게 되는 건 아닐까 싶었기에.
올해의 편지 : 편지를 비롯하여 활자로 남은 것들은 누군가의 가슴속에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글이 내게 영감을 줬다.
오늘은 받은 편지의 마지막 문단이 떠올랐다. 어두컴컴했지만 몇몇 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견딜 만한 것이라 생각하기로 마음먹는다. 다른 이들도 불빛을 느끼길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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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절대 변화시킬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다. 올해 내겐 유난히 부고가 많았다. 그들을 그리워하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세상과 이별하는 순간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상상해본다.
벗어나려고 할수록, 극복하려고 애쓸수록 외로움은 더 맹렬해지는 것 같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삶은 어두운 밤바다에 나 혼자 타고 가는 작은 배다. 하지만 이것은 나만의 운명이 아니며 다른 배들의 불빛을 느낄 수 있다면 삶은 견딜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올해의 환대 : 연희동에서 감개무량한 스키야키
인생 첫 스키야키, 무려 홈메이드, 환대에 따뜻해지는 마음. 석양이 아름다웠고, 예쁜 집 가구 소품에 대한 갈망이 더 커졌고, 귀여운 개 까뮈를 계속 품에 안으며 푸근해졌다. 집으로 돌아와 공유기를 설치하며 와이파이 이름을 까뮈라 지었닿ㅎㅎ
올해의 번뇌 : 나는 사회성이 없는 사람인 걸까
생활의 가장 큰 변화 : 사람들을 무작정 다 만나다가 나를 보다 더 중심에 세우기로 했다. / 오지랖 줄이기
오랜만에 오롯이 혼자인 하루를 보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기분이 좋다. 며칠 전부터 잠에서 깰 때 노곤하여 간을 쉬어줄 필요를 느꼈다. 서울에 올라온 후로는 거의 매일, 어제까지 17일 연속으로 마셨다. 당연히 몸에 무리가 갈만하다. 약속을 많이 잡지는 않았는데, 우연에 의해서든 필요에 의해서든 마실 일이 생겼다.
카카오톡에 검색 기능이 주어지며 이전의 시간을 소환하게 될 때가 있다. 나는 까짓 번개가 뭐라며 호출을 외면했을까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소박하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을 걷어차버린 것 같았다. 여기저기 쏘다닌 것은 더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겠다.
어제는 바쁘단 말을 입에 달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노력은 하겠지만 쉽지 않을 게 자명하다. 오래전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선생님이 주셨던 편지를 읽어본다. 키플링의 만일이다. 이전보다는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여전히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한 사람의 어른이 되는 것이 참 어렵다. 원래 끊임없는 되기의 과정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람 일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의 건강을 우선시하기로. 오늘의 노래는 강아솔의 그대에게. 사진은 며칠 전 까뮈와 함께.
오고 가는 이동시간에 끼니를 때우는 일이 잦아지면서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다. 적극적으로 임하겠다고 깝치다가 정작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여기저기 일을 벌인 셈이 됐다. 이번 주도 딴에는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한 것 같은데, 파토낸 것도, 이도 저도 아닌 셈이 된 것도 부지기수다. 가용할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줄어들고 여기저기 빚을 지고 미안해해야 하는 채무자가 된 기분이라 마음이 좋지 않다. 특별히 하는 일이 있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몸이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아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했다. 돌이켜보면 한 학기 생활을 통해 배운 것은 나는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란 점이었다. No라고 말할 줄 알고, 덜 짐은 덜어야겠다고 다짐한다. 그게 상대방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위해 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5월의 어느 날 우연히 마주한 글귀에서 무릎을 쳤건만 정작 실행을 못했다.
정말 오랜만에 머리를 비운 채 운동을 하고 집으로 걸어오며 생각했다. 매일, 매주, 매달 새로 생기는 일정들을 염두에 두며 마음껏 사람을 만나지도, 즐기지도 못하고 강약 조절을 하며 살고 있다. 시간을 끊임없이 쪼개고, 계획을 하고, 일을 나누고. 앞으로의 몇 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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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중요한 화두를 던져준 사람들 덕분에 그다지 회의하진 않지만. 문득 이 길이 아니었어도 소소하게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이 아니었어도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느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EBS 한국기행의 울릉도 풍경은 어찌나 좋아보이던지, 이대로 감정을 조절하는데 익숙해져 버리면 어떡하지 등등. 한편으로는 그동안 내 마음 가는 대로 하고픈대로 지낼 수 있었던 게 특권이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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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린더를 열었더니 일정이 빼곡하다. 1년 만에 친구를 마주하기로 했고, 정말 존경하는 분이 학교를 찾아오고, 호기심 가는 사람들의 글을 만나게 될 것이고, 새로운 경험도 할 것이다. 모두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순간이다. 모두 다 성에 찰만큼 즐기지는 못할 것 같지만, 완벽에 대한 욕심은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제때 답장을 하지 못한 혹은 미뤄둔 기약들도 쌓여있지만 타인을 너무 크게 생각할수록 아무것도 못할 거라 합리화해본다.
올해의 글귀
"네가 아는, 맘에 빚을 지거나 고마운 사람들한테 모두 맘을 표현해야 한다면 네가 얼마나 더 바쁠까 싶어서 말이야. 앞으로 그런 사람들이 더 쌓이면 그때는? 그러니 그런 부담 좀 내려놓고 그저 맘으로만 고마워하고 그리워하고 하는 것도 괜찮지."
올해의 아쉬움
1. 사진첩에 남은 사진이 줄어들고, 글은 더욱 줄어들고, 언어는 잃고... 그나마 담은 사진의 공간은 점차 관악구, 학교, 법대로 공간이 좁혀지고...
언어를 잃고, 시야는 좁아지고, 즐기던 것은 멀어지고, 주체적으로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들 때
2. 평소와 달리 같이 얘기 나눌 수 있을 친구들에게 연락 못하는 나를 발견.
며칠째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 파지는 카톡방과 넘쳐나는 메시지들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카오톡을 열 때마다 처리해야 할 업무를 확인하는 기분이 든다. 넘쳐나는 말들을 가벼이 여기거나 쉬이 스킵하지 못하는데 계속 쌓이고 따라갈 수가 없으니 정신이 매번 딴 나라에 가 있는 것 같다
3. 밥시간을 쪼개가고 만남의 시간을 쪼개고 모든 시간을 쪼개가며 한없이 무언가에 쫓긴다는 기분이 들 때. 여유가 사라진.
하루하루는 정신없이 흘러갔고, 1년이 흘렀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는다. 정확히는 1,2월의 일은 몇 년 전의 일로 느껴지고, 3월부터의 시간은 존재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며칠간 웰치스와 편의점 식품을 욱여넣은 끝에 첫 번째 매듭 - 소감은,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나는 성격이 정말 급했구나, 그래서 휘리릭 책장을 넘기기만 잘했구나, 전부터 느꼈지만 진득한 독해 습관이 길들여지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꽤나 고생하겠구나, 야심은 컸지만 최소한의 기초를 다지는 것도 정말 쉽지 않구나, 겨우 첫 번째 매듭일 뿐 앞으로 평생 끊임없이 갈고닦아야 할 게 많구나 뭐 그런 것들.
이런 건 사실 별일 아니다. 오랜만에 집으로 걸어오면서 이 길을 걸을 여유조차 없었구나 실감했다. 받지 못한 연락은 쌓였다. 하루하루 세상에 짓눌려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더뎌져가면서 그저 서로가 무사하길 빌 뿐이다. 친구가 추천해준 권나무의 노래 덕분에 그나마 하루를 보다 평온히 보낼 수 있었다.
올해의 깨달음
엄기호의 단속사회를 처음 접한 것은 3년 전이다. 한국에 돌아온 후 책을 읽으면서는 유레카를 외쳤다. 그 후 종종 책 내용에 관한 강연을 우연히 접하곤 했다. 며칠 전 타임라인에서 오랜만에 단속사회에 관한 화두를 다시 마주하게 됐다. 신기한 것은 매번 읽을 때마다 내가 주목하게 되고, 밑줄 치는 문장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처음 읽을 때는 사회 현상으로 주목했다면, 지금은 많은 부분이 내 이야기로 들린다. 원래 인간의 귀는 다른 동물에 비해 현저히 퇴화했다는데 몇 년 새 나의 귀는 더욱 닫혔고, 내 안의 동일성에 더욱 갇혀있다는 느낌이다. 성장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현재의 내가 '단속' 상태임을 일깨워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2017년의 절반이 지나갔다고 한다. 몰입과 집중이 아니라 인위적인 분주함에 만족해했던 것은 아닌지 되묻게 된다. 그럼에도 어찌 됐건 처음에 목표로 한,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최선을 다했다. 시간에 의해 쟁취해낸 것은 시간이 증명해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원래 시간의 흐름 앞에 나약했기에 불과 몇 개월 전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더욱 가물가물하다. 매번 여유 있게 생활하다가 이전과 전혀 다른 루틴을 보냈더니 많은 인연들과 더 이상 자주 교류할 수 없음을 실감한다. 그럼에도 삶이란 젖은 우산이 살갗에 달라붙어도 참고 견디는 것처럼 별 게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한결 견딜 만하단다.
돌이켜보면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당연히 모든 걸 이룰 수 없는 법이다. 그에 앞서 기본을 갖추는 것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일이지 않을까 되뇌어본다.
오랜만에 마주친 이들의 표정과 인상 변화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반년 전의 사진 속 나로부터 얼마나 변했을까. 앞으로는 또 어떻게 변할까. 어떤 변화든 간에 나 스스로가 마주할 수 있었으면 ;ㅁ;
오늘의 노래는 바람이 분다 - 소라 누님이 무려 예능에 나오신다길래 찾아봤다. 한창 라디오를 듣던 중학생 때 처음 접했으나 왜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 곡을 신청하는지 알 수 없었다. 스물 하고도 한참 지난 언젠가 처음 눈을 감고 듣게 됐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이 노래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구나 싶다.
올해의 힐링
얼터너티브 락을 즐겨 듣던 사람은 점차 한국 인디, 재즈, 클래식을 거쳐 자연의 소리를 찾게 되었다. 귀가 평온한 음악을 찾듯, 눈은 꽃이나 풀빛이나 하늘과 같은 자연을 찾았다.
삶은 얼마나 다양한 스토리를 가지느냐에 따라 풍부하고 깊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감기에 멍 때린 채 얼로운 타임을 찾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머릿속에 덥다는 생각이 가득한 시간이 찾아왔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그 안의 스토리를 통해 살아있는 사람을 그리는 작업은 나름 흥미롭지만, 정작 내 삶의 스토리는 단조로워졌다고 줄곧 생각했다. 이번 주는 '다른' 일이 많았다. 모처럼 다른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꽤 기뻤다. 내일은 투표를 해야 하는데 아직 고민이다. 그리고, 얘네 노래 진짜 쥑인다.
'평온한 풍경(사진)을 좋아하는 건 사는 게 조금 평온하지 않기 때문일지도'라던 누군가의 글이 떠오른 날
올해의 소비 : 내기, 가위바위보, 도박
"돈은 남지만, 사람은 안 남아요"에 불현듯 치이는 순간, 남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저 순간에 충실하고플 뿐이라는 나름의 대답,
올해의 영상 : 백상 예술대상
백상 예술대상 시상식을 보는 내내 미소 지었다. 상이라는 것은 결코 전부가 아니지만, 누군가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로 꽤 기쁘다. 수상소감에 묻어나는 구체적 삶들을 통해 이들의 삶과 관계, 그리고 감정을 상상한다. 단연 압권은 축하무대였는데, 기획한 사람들이 어떤 이들일지 궁금했다. 멀리서, 활자로 이 풍경을 조우한다면 진부한 그림일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 얼굴을 마주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벅찬 감정을 느끼게 된다. 행복한 미소와 꿈이 담긴 표정들이 아름답다. 그저 아름답다.
올해의 슬픔
부고를 들었다. 한 주 사이 두 번째다. 헌혈증과 혈소판 헌혈을 구한다는 이야기는 3년 전 병원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나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느꼈던 친구의 사진은 더없이 해맑았다. 다가오는 우리네 삶에 행운이나 진화 같은 특별한 변화는 없고, 남는 것은 대개 상실과 이별이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여전히 담담히 마주할 수 없다. 다만 지금 떠오르는 많은 벗들이 조금이나마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길 빌었다. 이전처럼 생각난다고 불현듯 먼저 연락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나도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고, 너도 틈틈이 웃을 수 있길 바란다는, 뭐 그런 안부.
3주 전 그가 남긴 마지막 글은 다음과 같이 맺는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세요. 이 말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저 역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가겠습니다."
올해의 믿음 : 5·18 민주화운동 대통령 연설
No more words needed - 말과 글의 힘을 믿어보고자 하던 차에 가뜩이나 뭉클했다. 웨스트윙도 생각나고. 식을 보면서 이렇게 벅찬 감정을 느낄 수도 있구나. 꼭 헌법 전문에 새겨졌으면 좋겠다.
올해의 이색 체험 : 도레미 데이
올해의 노래 : 자우림 샤이닝, 선우정아 그러려니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가난한 나의 영혼을 숨기려 하지 않아도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을까.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간다
끊어진 연에 미련은 없더라도
그리운 마음은 막지 못해
"어른이 되어갈수록 일상적인 슬픔은 삭히게 된다. 누구에게나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유난 떨지 않아야 하는 게 미덕으로 요구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곡은 슬픔에 겨워 마음껏 고조되지 않는다. 더 터질 것 같다가도 사그라들고, 목소리에 울음이 묻는가 싶으면 곧 지운다. 엔딩부에 쏟아지듯 터져 나오는 오케스트레이션으로 감정의 고조를 표현하지만 이조차도 곧 다시 잠잠하게 ‘그러려니…’라는 읊조림으로 삼켜지는 것이다.
미련이 없다는 말은 되돌리기 어렵다는 걸 받아들인다는 뜻일 거다.
각자의 삶은 갈수록 복잡하고 바빠지고, 더 이상 어릴 때처럼 긴 고민 없이 ‘우리 다시 자주 만나서 놀자!’라고 할 수 없으니까. 그저 그러려니. 잘 살겠지. 설령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누군가라 하더라도 이따금씩 그의 삶이 안녕하기를 빌곤 한다. 관계는 변해도 추억은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올해의 앨범 : Cigarettes after Sex, 김윤아 타인의 고통
올해의 공간 : 용산구 안녕! 관악구 안녕?
올해의 나들이 공간 : 옥상정원....ㅋㅋㅋㅋㅋ
공부하다가 불현듯 자연을 보고플 때면 찾던.
사진첩에 쌓이는 건 옥상정원뿐. 모두 다른 날. 오늘은 밤하늘이 참 예뻤다. 6월이라니.
정신없던 와중에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바깥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반가운 마음에 밖으로 나가 한참을 바라봤다. 애니메이션 같기도 하고, 판타지 같기도 하고. 비 오는 날이 싫었는데, 언젠가부터는 비 온 다음을 기다린다. 사진에 담기지 않는 빛과 색감과 풍광이었다. 한동안 기억에 남을 순간이었다 헿
올해의 등반 : 겨울산, 관악산
흐르다가 문득 정지하고 싶은 때에 찾았다. 산은 늘 말이 없지만 겨울산은 더욱 고요했다.
올해의 새로운 경험 :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을 때 ^^
https://brunch.co.kr/@scintiller/35
올해 가장 큰 변화 : 일상 및 생활 사이클의 변화
올해의 자잘한 변화 : 술을 더 이상 미친 듯이 퍼먹지 않게 됐다. 다음날 지끈거림과 죽어가는 뇌세포와 아파오는 내장과 하루를 온전히 날리는 느낌 때문에. 그리고 이 방식이 그다지 건강한 방식의 해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올해의 다짐 : 한 사람에게라도
정희진 선생의 칼럼이 떠오른다. 한때 이데올로기에 마음을 두었고, 한때는 사람에게 마음을 두었지만 지금은 없단다. 다만 새해를 맞아 내 마음 둘 곳을 찾지 말고 쉽지는 않겠지만 남들이 마음 둘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는 다짐을 말했다. 한 사람에게라도 의미 있는 사람이면 되지 않을까라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이 갔다.
오랜만에 한 친구를 만났다. 기억조차 흐릿한 내가 했던 말과 추천으로 변화된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감정 기복이 보다 심해졌지만 나보고 구원자란다. (내가 널 망치러 간 건 아니란다. 그나저나 너는 뭘 믿고 내 말을;;) 내게 솔직한 목소리를 들려준 덕에 이런저런 썰을 풀었던 것 같은데, 그동안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기쁘고 감사했다. 말과 글이 가져오는 변화를 확인하는 일은 언제나 신비롭다. 용기를 갖게 된 친구가 보다 덜 상처 받고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개저씨의 길은 넓고 멋진 중년의 길은 좁다.
올해의 목표 : 담담함 그리고 실패
https://brunch.co.kr/@scintiller/30
여러 영화가 떠오른다. 우리네 다가오는 삶에 행운이나 진화 같은 특별한 변화는 없을 테다. 남는 것은 대개 상실과 이별인데, 그렇더라도 때로는 태연하게 때로는 즐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단념의 정조를 담은 영화들. 상투적인 언명이지만 이를 일깨우는 개별 영화의 이미지가 지니는 힘은 세다.(김영진, "단념의 정조", 『씨네21』)
삶은 계속 이어짐을 암시하는 다르덴 형제와 마리옹 꼬띠아르의 <내일을 위한 시간>, 어찌할 도리없이 예정된 실패를 껴안는 과정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예술가들(남다은, "소멸 중인 흘러넘침", 『씨네21』)을 체념이 아닌 적극적인 수동으로 담은 줄리엣 비노쉬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앞과 뒤가 급격하게 달라져도 그게 가능할 수 있는 게 우리 일상이고 지속적인 삶이며 그 삶을 살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태풍이 지나가고>(김영진, 같은 글).
나는 여전히(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관념적이어서 영화를 이해했다고 생각했건만 정작 내게 새로이 다가온 것에 우왕좌왕하며 쓴웃음을 짓고 있다. 아둔하여 아무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만은 예외일 거라는 헛된 착각이었구나 싶다. 직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상상력을 내면에 지닌다는 게 참 어렵다.
올해의 불현듯 : 나는 부모님께 어떤 존재인 걸까
올해의 술 : 로열 살루트 21년 산
올해의 잘한 결정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에 문을 두드린다는 것.
연휴라는데 출근을 하고 수업을 해도 별 감흥이 없다. 지금은 괜찮은데 점점 무뎌져서 이런 나날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진 않을까 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딱히 현재를 유예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러모로 몸과 마음이 건강한 덕이겠거니 싶다.
올해의 풍경
퍽, 아름다운 풍경
해방터에서 그라-데이션에 놀랄 때 창문의 셀로판지를 통과한 빛이 다채로움을 보탰다. 계단을 내려가 다가서자 조우한 알록달록한 불빛과 산너머 노을의 또 다른 그라-데이션은 퍽, 아름다웠다. 다시 계단을 내려간 곳의 벤치 주변에는 예술주간에 설치된 커튼이 놓여있었다.
밖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심드렁했으나 안으로 들어서자 투명하면서도 파란빛 보랏빛이 뒤섞인 천과 노란 조명, 정원의 녹색 잔디, 그리고 그 너머 어렴풋한 노을과 아직 어둠이 온전히 다가오지 않은 하늘까지 모든 빛이 신비롭고 조화되었다. 고개를 위로 돌리니 바다에서 데려온 친구들로 엮어진 모빌도 함께 했다. 이내 나는 예술주간 만세를 외쳤다. 행복이 그리 멀리 있지 않구나 하며 -
올해의 덕질 : 김승섭 교수님
현실적인 척하시나 묻어 나오는 선함과 건강함이 반가웠다.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기에 내가 건강해야 더 잘할 수 있다는 말도. 사인과 인사 따위에 집착하지 않고 내면의 교감에 만족한다고 말했으나 이내 줄을 서 있는 나를 발견.. 방심하다 1쇄 본을 놓쳐 안타까워하다가 알라딘 중고를 통해 구한 책을(덕내 킁킁) 수줍게, 하지만 뿌듯하게 내밀고 주절주절 인사를 드렸다. 묵묵히 각자의 일을 하면서 언젠가 조우하게 될 동료들에 대한 동경이 있는 내 맘이 잘 전달됐을까나. 여러모로 반가운 인연을 비롯하여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경에 신기해라 했던 기억.
올해의 책 :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136)
예컨대 ‘그는 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나 ‘걱정 말아요, 괜찮을 거예요’ 같은 말들은 내 쪽의 끝을 놓아버리면서 던지는 밧줄이다. 반면에 ‘당신이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 알겠어요’와 같은 말은 한쪽 끝을 쥐고 던지는 밧줄이어서 상대방이 믿고 붙잡을 수 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말만이 상대방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지만 달리 말하면 이것은 막연한 ‘거예요’와 분명한 ‘알겠어요’의 차이이기도 하다. 문학이 위로가 아니라 고문이어야 한다는 말도 옳은 말이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문학이 위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고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람의 말만이 진실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이번 책에서 권여선의 소설은 고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표정을 짓고 있다. 요즘의 나에게 문학과 관련해서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268) by 신형철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마음속에 쌓인 기억이 없고 사물들 속에도 쌓아둔 시간이 없으니, 우리는 날마다 세상을 처음 사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 오직 앞이 있을 뿐 뒤가 없다.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과 교섭해온 흔적이 남지 않고, 삶이 진정한 기억으로 그 일관성을 얻지 못하면, 이 삶을 왜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 거기에는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것에 대한 싫증이 있을 뿐이며, 새로운 것의 번쩍거리는 빛으로 시선의 깊이를 대신하려는 나태함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것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는 것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유행과 사물의 감수성)"
김현진, 진심의 공간
삶은 추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지만, 삶을 아름답게 읽으려는 노력만이, 나의 공간을 아름답게 만든다. 아름다움을 깨닫는 일은,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잊혔던 감정을 읽어내는 일과 같다.
올해의 단상 : 포항 지진 이후
재난은 우리를 발가벗기고
러시안룰렛의 원리가 극도로 발현될 때 살아남은 자가 내뱉는 다행과 안도는 즉각적이다. 타인에 대한 걱정과 연민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작년부터 꾸준히 이 문제에 있어 미디어와 사람들의 서울 중심성을 느낄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내가 속한 곳을 감각케 된다. 인간은 본디 타인의 처지를 터럭만큼도 이해하지 못하고 한없이 취약하다. 그렇기에 이런 반응들에 진절머리 칠 것은 없다. 다만 사람은 삭제되고 단순히 가십거리로 죽음과 공포와 피해가 전락될 때 극히 피로하다. 조금이나마 연결되어 있다는 그동안의 착각은 즉각적이고 생래적인 반응 앞에 산산조각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와주고 공감해주는 이들이 있었기에 하루를 버텼다. 나 또한 타인의 고통에 수천 번 수만 번 무감했겠지. 하지만 재난은 순식간에 무차별하게 새로운 선을 그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 가장 무섭고, 슬프고, 뭐 그렇다..
올해의 소송 : 기지촌 위안부 국가배상 소송
2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기지촌 미군 위안부의 국가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준비를 마치고 기자회견부터 1심 판결까지.
많은 것이 변했다. 법은 왜 당연한 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걸까라며 분노했던 이는 올바른 말을 하는 스스로에 취해있던 게 아닌지 의심하게 됐다. 판결에 일희일비했던 이는 자신의 편의에 따라 정의를 칭하는 태도에 냉소하게 됐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수십 년의 세월 속에 120명의 할머니를 소송 당사자의 위치로까지 다독이고 끌고 온 이들은 활동가들이다. 법정에서 서류를 검토하는 이들이나 당사자를 대리하는 이들보다 더욱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될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새로이 생각하게 된 점도 있다. 당사자-대리인 사이의 결코 좁혀지지 않을 입장 차이와 이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국 곳곳에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온 할머니들을 대리하는 이가 짊어져야 할 역할과 그 무게감. 그저 하고픈 말을 내뱉는데 자족하지 않고, 기왕이면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프다는 생각.
누군가에게는 목숨과도 같은 절박한 일이 누군가에겐 그저 소일거리에 불과하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멀다. 하지만 그 사실이 연결되고자 하는 누군가의 열망을 꺾지는 못한다, 고 김혜리는 말했다. 눈이 내렸다. 소나무에 쌓인 눈을 한참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