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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용 Dec 24. 2019

중간 관리자 비망록 : 자유와 방종, 열정과 중독 사이

팀장 실패 일기

얼마 전 참가했던 한 모임의 화두 중 하나는 '중간 관리자의 고뇌'였다. 팀장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나는 정말 팀장에 걸맞은 능력을 갖췄을까. 실무와 동 떨어진 관리 업무를 계속 하고 있는데, 이대로 회사를 나가면 먹고 살 수 있을까. 시시각각 다가오는 통제의 유혹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스타트업 업계에선 흔한 일이다. 얼마 안 되는 연차에 빠르게 팀장을 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 또한 그랬다. 전직장에서 3년차에 팀장을 달았으니 별별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리 없다. 이건 나의 경험담이다. 확실하게 망해 본 기억이다.


자유와 방종


나는 자유로운 조직의 힘을 믿는다. 하지만 자유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책임질 수 있는 실력이 전제다. 이 말은 기업이 애초에 실력이 있는 사람을 뽑거나, 그게 아니라면 자유롭게 둬도 알아서 일할 만큼의 실력을 키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초기 기업은 돈이 없다. 그렇기에 경력이 없는 신입 직원들이 들어오기도 한다. 이들은 당연히 일머리가 없다. 이런 이들에게 "우리는 자유로운 조직이니, 알아서 하십쇼"라 한다면 벙찐다. 내가 왜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멍 때리고 있는지, 왜 아무도 신경 써주는 사람은 없는지 자괴감에 빠진다.


이들이 멍청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가만히 냅둬서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줘야 한다. 다른 의미로 실력 향상은 직원에게 줄 수 있는 확실한 동기부여 수단이다. 물론 처음부터 일을 잘하는 사람이 가끔씩 있다. 그런 사람은 안 나가게 잘 해주자.


고백하자면 난 그러지 못했다. 핑계를 대보자면 내 일에 바빴다. 매니저 일과 별개로 사람을 만나고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계속 됐고, 계속 하고 싶었다. 엉겁결에 받은 매니저 업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생이 관종이라 현장에 나가서 내 이름을 붙인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다.


책임질 수 없는 이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방종이다. 자유와 방종은 한 끝 차이다. 이걸 꽤나 나중에 알았다.


열정과 중독


나는 워커홀릭이다. 휴일이고 야간이고 가리지 않고 일하는 데 익숙해졌다. 필요하다면 휴일 저녁 술자리에서 만난 누군가의 이야기가 다음날 콘텐츠가 된다. 바로 어제는 휴가였는데 글 한 꼭지 썼다. 오늘도 휴가인데 아침에 업무 제안 이메일을 한 통 보냈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가 첫 번째 이유였고, 내외부 파트너와 약속한 납기를 맞추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 두 번째 이유다.


세상 모두가 나 같을 줄 알았다. 누구나 필요하다면 6시가 넘어서도 일을 할 줄 알았다. 당연히 약속한 납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킬 줄 알았다. 이런 생각은 나의 오만이었다. 나에겐 열정으로 포장되는 일이 누군가에겐 중독이다.


한 때는 나와 같지 않은 직원을 원망하기도 했다. 부탁하기도 했다. 한탄하기도 했다. 이건 답이 되지 못했다. 나의 일은, 회사의 일은 직원들의 동기 부여를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다. 직원들 자신의 일로 만들어야 한다.


필요한 것은 투명한 성과 측정 시스템이다. 자유로운 조직에서는 집에서 고양이 발바닥을 만지며 일을 하든, 회사에 오후 2시에 나와서 4시에 퇴근하든 딱히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재택 근무를 하든, 2시간 근무를 하든, 성과를 만들 수 있는 실력이 있다면 괜찮다는 생각이다.


방점은 '투명한'에 찍힌다. 성과 측정 시스템이 왜곡되는 경우는 꽤나 많다. 인사권을 가진 이를 향한 권력 집중으로 인해 실력이 아닌 관계에 의해 평가 받게 된다. 중요한 것은 특정인에게 권력이 집중되지 않는 성과 측정 체계 구축이다. 조직원들의 공감과 함께 성과 측정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주 52시간 제도는 찬성한다. 직원에게 업무 시간을 벗어나는 일을 주고 내일까지 해오라고 말하는 것은 혹사다. 혹여 근로계약서에 작성된 시간 이상으로 일한 직원에게는 초과 임금을 줘야 하는 것이 맞다. 노동법이 그렇게 정하고 있다. 


다만, 누군가는 회사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미친 듯이 일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럼 그냥 두면 된다. 그런 이들 중에서 실력까지 출중한 이들이 있다. 이런 직원한테는 역시나 잘해줘야 한다. 도망치면 회사가 손해다.


그래서 해답?


하지만 난 실패했다. 거창한 말들을 잔뜩 써놨지만, 위에 했던 말들을 지키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자유로운 조직의 힘을 믿는다. 그리고 자유로운 조직을 구축하는 가장 큰 힘은 투명한 성과 측정 체계라고 믿는다.


지금 직장에선 팀장 일을 하지 않는다. 다만, 팀장 같이 일을 한다. 스스로 업무를 정하고, 납기를 정한다. 협업이 필요하다면 그때그때 필요한 사람에게 연락한다.


바뀐 것은 매니징을 해야 할 사람이 불특정 다수의 팀원이 아닌 '나 하나'라는 점이다. 그래서 확실히 편안하다. 누군가와 마음 싸움 할 일은 없어졌다. 나 하나만 잘하면 된다. 안정이 찾아왔다.


모임 말미에 한 팀장이 나에게 물었다. 그는 "하고 싶은 실무 역량은 떨어지고, 관리만 하고 있다고 생각 되는데 앞으로 다른 직장에서도 먹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 말했다. 나는 "관두면 편하다"라 답했다. 


누군가 나에게 팀장을 다시 하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싫을 것 같다. 차라리 대표를 한다면 모를까. 이 글에선 풀지 않았지만 어정쩡한 권한 위임은 마이크로 매니징과 다를 바가 없다. 이건 팀원들에게도 해당되지만, 팀장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위에서 눌리고, 아래서 치이는, 그럼에도 어디에 하소연도 못할 많은 중간 관리자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글을 쓰는데 영감을 준 글

https://brunch.co.kr/@yjluck/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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