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 2주를 남기고 테이퍼링을 시작했다. 테이퍼링은 원래 "점점 가늘어지다"라는 뜻으로, 대회 전 약 2주 동안 훈련 강도와 양을 점점 줄여서 당일 최상의 컨디션을 만드는 것이다. 마치 시험 전에 벼락치기 대신 일찍 자는 것과 비슷하다.
지난주에는 6시간을 뛰었는데 이번 주는 새벽에 편안한 속도로 4시간만 달렸다. 하늘이 붉어지며 밝아왔다. 계속 홀로 뛰다가 반대편에서 뛰어오는 러너를 만나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나눴다. 날이 밝아지니 하나둘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함께 걷는 댕댕이들도 정겨웠다.
대회 7일 전. 가톨릭 세계청년대회는 전 세계 청년 신자들이 한 곳에 모여 신앙과 문화를 나누는 국제 행사이다. 가톨릭 교회 내에서는 나름 올림픽에 버금가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2027년에는 드디어 서울에서 개최된다. 우리 본당에서도 적지 않은 수의 청년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그런데 시드니에서 서울까지의 왕복 항공료와 숙박, 식사, 교통비를 감안하면 인당 비용이 대략 6~7백만 원이 든다.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본당 신부님이 재정 부담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1990년대 인기 힙합 듀오 지누션의 멤버였던 가수 션이 광복절을 맞아 81.5km를 뛰면서 독립 유공자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본당 사목회 임원들이 각자의 재능을 이용해 세계청년대회 기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겠다.' 내 개인적으로는 1km당 1달러씩, 총 82km를 뛰니까 82달러를 세계청년대회 기금으로 후원하고, 성당 신자분들께 알려 기금 마련에 동참해 달라는 계획을 세웠다. 본당 신부님께 말씀드리니 흔쾌히 허락하셨다.
토요일 저녁 청년미사 직후에 대회 당일 복장을 입고 성당 출구 쪽에 서서 모금을 했다. 현재 회사와 전 회사 동료들에게는 온라인으로 펀드레이징을 했는데, 성당에서는 순전히 오프라인만으로 했다. 많은 신자분들이 기금함에 돈을 넣으며 미소를 보내주고, 화이팅을 외쳐주셨다. 저녁미사 후의 꽤 쌀쌀한 날씨에 얇은 바람막이를 입고 있어 추웠던 몸이 마치 봄 햇살을 받은 듯 따뜻해졌다. 내 마음은 더 따뜻해졌다.
대회 6일 전. 매 주일 참석하는 레지오 주회합의 교본 연구 시간이었다. 그 제목이 마침 '달릴 곳을 끝까지 다 달려야만 한다'였다. 레지오는 한계를 두지 말고 아낌없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지만, 나에게는 마치 성모님이 함께하셔서 울트라 마라톤 완주를 독려하는 의미로도 느껴졌다. 이런 우연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대회 5일 전.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설레기도 하지만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완주를 못하면 어떡하지?' ‘울트라 마라톤 나간다고 온 동네에 광고를 했는데 중도 포기하면 엄청 민망할 텐데.' 시험을 앞둔 수험생 심정이었다.
수능 이전의 대입 시험인 대학입학 학력고사를 치를 때였다. 긴장감이 극에 달해 싸인펜을 쥔 손이 벌벌 떨리기까지 했다. 대학에 진학해서도 시험 때마다 긴장이 되었다. 군대 제대 후 복학해서 4학년 1학기말 어느 전공과목 시험 시간이었다. 시험 시작 시각을 기다리는데 역시 떨렸다. 곰곰히 생각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긴장되고 떨리지? 내가 85점 수준으로 시험 공부를 했는데 90점이나 100점을 바라는 게 아닌가? 아니면 70점이 나올까 걱정되나?' 그동안 치렀던 수많은 시험들을 떠올려보니 거의 대부분 내가 공부한 만큼 점수가 나왔다. 운이 좋으면 조금 점수가 올라갔고, 운이 나쁘면 조금 점수가 떨어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시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대로 받아들이리라 마음먹었다. 그 전공시험을 긴장감 없이 편한 마음으로 치렀다. 앞으로 볼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4학년 때 그걸 깨달은 게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그 이후 시험들도 역시 편안했다. 시험보는 게 고통스럽지 않았다.
울트라 마라톤 82km 대회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지난 5개월 동안 매일 출퇴근 달리기를 하고, 일요일에는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고, 콧물을 흘리며 달리고, 빗속에서 달리는 경험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 아닐까? 거기에다 기금 모금을 하면서 따뜻한 기운을 한껏 받았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