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음의 옹호>
수줍음이 곤란한 것은 -수줍어하는 사람에게도 그와 소통하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진공 상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줍음은 사람의 성격이라는 스튜에 들어 있는 한 가지 재료일 뿐이다. 수줍음은 다른 특징들과 섞여 있고-그리고 종종 다른 특징들에 가려져 있다- 이것이 수줍음이 헷갈리게 느껴지는 한 이유다. 수줍어하는 사람 본인에게는 수줍음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가장 지배적인 성격적 특질로 느껴질 테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 사실이 늘 그렇게 분명해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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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음을 타는 것, 자신이 과한 자의식에 휘둘리며 그 탓에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고 느끼며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 하지만 나는 우리가 수줍음으로부터 개인의 책임에 관하여,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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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수줍음의 옹호>에서 발췌
싫어하거나 애정이 없는 게 아니라, 주목받기 싫고 쑥스러워서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할 때가 있다. ‘내성적인 사람은 내성적이라 사회 생활에 더 큰 부담을 느낀다’고 생각해왔는데, 나를 대하는 누군가는 그런 내향성을 이해하지 못해 힘들 수도 있다는 점은 최근에 알게 되었다.
입사 첫 해 내 사수 선생님이 생신이실 때 아무것도 못 챙겨간 적이 있다. 보통 차지선생님(수술실 진료과 별 팀장 격으로, 내 사수 선생님은 차지 선생님이셨다) 생신이실 때는 아침 간식 시간에 다같이 먹을 것을 많이 챙겨 오는데 그날따라 너무 단촐했던 것이다. 같은 과의 선생님이 “OO샘이 케익 사올 줄 알고 일부러 피해서 파이 사왔는데. 하하.”하며 웃으시는데... 근무하면서 가장 얼굴 빨개진 민망한 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쥐구멍이 있다면, 타임머신이 있다면 어디로든 나를 보내주오.
‘아침 간식 시간에 함께 먹을 케익을 사갈까? 롤케익이나 쿠키같은 간식을 사갈까? 케익은 무난하게 프랜차이즈가 좋을까, 아니면 정성을 들여 프리미엄 케익을 사가는 게 좋을까?’ 전날에서야 다음날이 선생님 생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엄청 고민했었다. 사회생활 첫 해였던 나는 어떻게 해야할 지 선택 장애가 왔고, 수술 공부보다 더 멘탈이 흔들렸다.
무엇보다 윗사람한테 ‘아부하듯이 보일까봐 쑥스러워서’ 아무것도 정하지 못했던 내가 참 어렸다. 선생님을 존경하고, 축하하는 마음은 굴뚝같음에도 소심함이 극에 달해 표현할 방법을 놓쳐버렸다. 결혼, 생일, 임신 출산 등의 경조사는 아부보다는 사회생활의 축에 드는 것인데도, 사회 경험이 적은 사회초년생인데다 표현이 적은 경상도 출신으로 그것조차 마음이 간지럽고 낯설었던 것이다. 입사한지 오래되지 않아 이전에 본 선례가 없으니 우리 팀 분위기는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겠고, 신규의 눈에 띄는 행동은 소문이 나니 부담스럽고, 어디 여쭤보기도 애매했다. 동기들도 자기 프리셉터 선생님 생일을 겪어보기 전이었으니 우리끼리 머리를 맞대어 본들 답이 나오진 않았다.
팀 별로 다르긴 하지만, 수술실 선생님들은 누군가의 생일, 로테이션, 출산 휴가 전 마지막 근무일 등 나름의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아침간식 시간에 십시일반으로 먹을 것을 가져온다. 주로 메인은 나눠먹기 좋은 케이크, 사이드 메뉴는 커피다. 냉장보관식품은 품목이 겹치면 보관이 조금 난감하기 때문에 약간의 눈치 싸움(?)이 있는데, 또 이에 대한 생각이 다 달라서 누가 뭘 챙겨오겠다 미리 말하거나 상의하지는 않는다. 강압적인 것도 아니고 자율적인 분위기로 행하는 거라, 물어보는 것 자체가 그럴 생각이 없던 사람에게 실례가 될까봐 그러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아끼는 후배가 로테이션을 하게 되었을 때, 과거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고민만 하다가 아무것도 안 하느니 무엇이라도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좋겠다고. ‘A 선생님이 케익을 사 올 것 같고 B 선생님도 이런 경조사 때 음료를 꼭 챙기셨던 스타일인데... 흠... ’ 제과점에도 들려봤지만 딱히 나눠먹고 기념일을 챙길만한 간식이 보이지 않아서, 품목이 겹쳐도 보관이 용이한 포장의 과일 주스를 사갔다.
다행히, 아침 간식 시간은 각기 다른 품목으로 성공적이었다. 예상대로 두 분의 선생님이 각각 케익과 커피 음료를 사오셨고, 나는 주스를 안심하고 꺼낼 수 있었다. 이 작은 행동에도 내가 변화한 것을 알고 계신 선생님이 부러 “OO이가 챙겨왔어? OO아~ 잘 먹을게.”라고 말씀해주셔서 조용히 웃었다.
같이 일하면서 조직문화와 삶의 시간과 경험을 공유하는 동료들 중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마주치면 반가이 인사하고 또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나누지만, 말재간이나 적극성과 센스가 부족한 나는 먼저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작지만 소소하게 시도하는 중이다. 저는 선생님의 경험과 지식을 존중하고 좋아해요. 같이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기뻐요. 아끼는 사랑을 표현하는데는 주저가 없는 사람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