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싣고 온 발걸음
여행을 계획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한 충동 때문이었다.
졸업반이었고, 졸업논문을 이번 학기 내에 작성해야 했다. 당연히 러시아어로. 몇 문장 써 놓고 나면 이게 문맥에 맞는지 문법이 맞는 지를 학교에서 몇 시간 씩 골을 썩이다,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겨울방학에 돌입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공간 뿐이었다. 교실이 아닌, 집에서 그렇게 러시아어와의 사투를 벌인 지 일주일. 그냥 어디라도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나 혼자 이렇게 계속 써 내려가도 담당 교수님이 이걸 얼마나 수정할지도 잘 모르겠고, 이렇게 스트레스만 쌓여가는 것이 너무나도 답답했다. 그래서, 어딘가 떠나야 겠다고 생각했다. 장소는 사실 예전부터 정해 놓고 있었다. 10루블 지폐에 그려져 있는 그 댐. 이 곳 이르쿠츠크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알고 있었다.
이 곳에 그려진 댐은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지폐에까지 실리는지가 궁금했다. 만일 별 거 없는인공 구조물이더라도, 그냥 물이라도 콸콸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좀 후련하지 않을까 싶었다. 인터넷으로 크라스나야르스크가 맞는 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 날 바로 표를 알아봤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출발할 수 있는 게 몇 시인지를.
그런데, 일단 기차 시간표를 알아보고 나니 여행 계획을 짜려고 보니 애로사항 두 가지가 생겼다. 첫 번째는 이르쿠츠크에서 크라스나야르스크까지는 기차로 18시간이 걸린다는 것. 두 번째는 이 댐이 크라스나야르스크 시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야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간만 되면 더 천천히 구경을 하고 싶었으나, 논문이나 다른 시간 계획상 여행기간을 더 늘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틀동안 도시를 구경할 수 있는 가장 빠듯한 일정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일단 오후 2~3시쯤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다음날 아침 8시정도에 도착해서, 그날 바로 댐을 보고 크라스나야르스크 시내로 돌아와서 숙소를 잡는다. 그리고 아침 일찍부터 시내구경을 한 다음, 다시 저녁때 즈음해서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와 또 다시 밤을 기차 안에서 보내는 것으로. 마음은 지금 당장 훌훌 털고 떠나고 싶었지만,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마냥 ‘가장 빠른 표로 주세요’ 라고 멋들어지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마 그러면 여행계획이고 뭐고 아무것도 맞출 수 없었을 테니까. 아쉬운 대로 다음 날 기차를 잡아 놓고, 일단은 잠을 청했다. 계획이 잡힌 이상, 논문이고 나발이고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그저, 빨리 떠날 시간이 오기를 기다릴 뿐.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여장을 꾸렸다. 어차피 이틀밖에 있지 않을 거라면 그렇게 많이 쌀 것은 없다. 조그만 손가방 하나에 속옷류만 간단하게 챙기고, 시간을 맞춰 이르쿠츠크 역사로 향했다.
이르쿠츠크 역사 앞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많다. 역사가 그렇게 큰 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욱여넣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러시아 사람들은 기차를 많이 이용한다. 이것은 ‘이용하는 것을 좋아한다’ 라는 선호도의 문제는 아니다. ‘이용할 수 밖에 없다’ 라는 결정론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그냥 평범하게 ‘이용한다’ 라고 적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이 사람들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기차로 3시간이 걸려도, 이틀이 걸려도, 이 사람들은 그게 당연한 듯 침대칸에 누워 십자말풀이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같이 가장 먼 곳으로 이동해도 5시간도 걸리지 않는 곳에서는 참으로 생소한 풍경이다.
역에는 제 시간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인파에 밀리다 기차에 아무래도 조금 늦게 들어가게 되었다. 안에 들어서자 마자 출발한다는 예령도 없이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랴부랴 짐을 올리고서는, 정해진 좌석에 앉아 바깥 경치를 감상할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