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늦은 오전, 어머니가 아침상을 내오셨습니다.
"술 적당히 마셔. 이제 몸도 안 좋잖아."
"어마마마, 소자 지난밤 통닭이 너무 맛있어, 그냥 닭만 먹기엔 맥주에게 미안해 두 잔 마셨사와요."
"아유 징그러, 속이나 풀어!"
북엇국 내음이 훈훈한 듯 은은하게 풍겨옵니다.
오래 전 그 밤이 슬며시 다가옵니다.
1999년 초겨울 어느 저녁, 절친한 친구집에서 술에 젖었습니다.
IMF에 세기말이 겹쳐진 그 무렵, 우리는 군대에서 돌아왔습니다.
제대만 하면 세상 모든 걸 다 손에 쥘 것 같던 꿈은, 그저 백일몽으로 나뒹굴었습니다.
굳어버린 머리로 공부해 봐도, 졸업 후 미래엔 짙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질 뿐이었습니다.
불안, 절망, 허무...
백세주에 소주를 반반 섞는 오십세주가 유행이던 시절이었습니다.
몇 차례 배합에 실패하곤, 냉면사발에 백세주와 소주를 병째로 부어 넣었습니다.
국자로 잔에 따라 털어 넣으며 넋두리를 던졌습니다.
"난 말이다. 군바리생활 마치면, 진하게 사랑 한번 할 줄 알았다!"
"넌 광기만 안 부리면 충분히 좋은 애 만난다니까. 제발 니가 좋아하는 여자랑 논쟁 좀 하지 마. 이겨서 뭐 하게?"
"여자들이 똑똑한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무리 아인슈타인이라도, 자기를 잡아 죽일 듯 몰아치면 생각도 하기 싫을걸?"
"칫."
"그리고 너 안 똑똑해. 첨엔 나도 니 목소리랑 말투만 듣고 살짝 머리 좋은 줄 알았는데, 금방 밑천 드러나더라. 나중에 약 같은 거 팔면 잘 팔 것 같긴 해."
"냉정한 영장류 시키. 야, 담배나 한 보루 피우고 올게."
"같이 가!"
연달아 세 대를 태우고 돌아오니 냉면사발 술수위가 낮아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야, 똘이 또 마셨다!"
녀석의 집엔 꼬맹이 발바리가 있었는데, 이 녀석이 가끔 콜라나 사이다를 마신답니다.
달큰한 맛이 나는 백세주도 똘이에겐...
풀린 눈으로 허공을 향해 짖더니, 나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코당탕 뒹굴었습니다.
개도 넘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안 순간이었습니다.
똘이의 주사는 달리기였습니다.
계속 술사발을 쳐다보며 애걸하는 녀석을 말리려면, 달리고 달려야 했습니다.
방이 좁아 계속 달리려면 같은 공간을 뱅뱅 도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콜물리의 법칙: 술 마시고 빙빙 돌면 토한다!
"우우욱!"
이런 그지 같은!
"밥 먹자!"
눈을 뜨니 친구가 밥상을 차렸습니다.
"아우, 나 좀 더 잘게. 속 부대낀다."
"북엇국 끓였어. 국물 한 술 떠봐."
"니가 내 마누라세요? 속 걱정도 다 해주고."
갑자기 어제 같이 퍼마신 강아지가 떠올랐습니다.
"야, 똘이는?"
"벌써 해장하고 계신다."
이 녀석 북엇국을 할짝대며, 지난밤 과음을 후회하는 듯 보입니다.
마치 나처럼.
난 앞으로 얼마나 많은 푸념과 과음과 후회와 다짐을 반복할지 상상해 봤습니다.
"야, 우리 언제쯤 술 끊을 수 있을까?"
"음... 죽을 때까지 가능할까? 죽어도 제삿상에 술 올라오지 않을까?"
"그럼 자식이 있어야 하나? 결혼 못 하면 진정 국물도 없는 건가?"
"북엇국물이나 마셔!"
녀석의 말에 피식 웃음이 터졌습니다.
"퍽퍽하면 국물이라도 마셔."
어머니 목소리가 좋습니다.
그 잔소리마저 참 정겹습니다.
20년 전 그 설익은 푸념의 밤과 주정댕이 똘이도 아련합니다.
오늘 저녁엔 오랜만에 친구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말린 명태'로 알고 있는 북어는, 원래 '북쪽의 물고기'란 뜻이었습니다.
명태는 함경북도 명천에 사는 태씨 어부가 관찰사에게 이곳의 물고기를 찬으로 내놓아, '명천태씨의 물고기'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었다죠.
불현듯 통북어포에 OB맥주가 당깁니다.
내일도 북엇국 생각이 간절해질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