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부터 감정이 없어진 느낌을 받았다. 일종의 무기력이나 무력함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기에는 표정을 읽을 수없다는 소리도 종종 들었고, 웬만한 일에는 '그럴 수 있지'라는 생각과 함께 무시하기 바빴고, 최선을 다해 연기를 했던 것 같다.
어쩌면 어느 날이 아니라 원래 그랬을지도 모른다. 친구와 대화를 하면 1시간 이상을 친구가 말을 하면 난 옆에서 묵묵히 듣기만 하기도 했었다. 무언가의 큰 사건이 터져도 나랑 상관없는 일이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뿐더러 이해하지 못한 적도 많았다.
'왜들 화가난거지?'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가끔은 나도 내 감정을 모를 때도 많았다. 화가 난 건가?
짜증만 난 건가? 아니 뭐 그럴 수 있지 않을까?
뭐가 정답인지는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웠던 적도 많았다. 때로는 그러한 것들이 스트레스가 되어서 끊임없는 두통에 시달리기도 하고 두통은 나와의 영원한 친구라는 자리를 잡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진통제라는 친구 또한 새롭게 자리하게 되었다. 사실 물 흐르듯 사는 게 특징이라서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한 해가 지나고,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도 만나보면서 느낀 것인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는 최근이기도 하다. 심지어는 주위사람들이 아프거나 다쳐도 걱정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있지'로 넘어가 버린다.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솟구치면서 무언가로 틀어막을 뻔한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썩어있는 송장 같은 느낌보다는 시들기 직전의 식물이나 굶주리고 있는 동물이 아닐까 싶다. 시들기 직전의 식물이나 굶주리는 동물에게 필요한 건 영양소와 마시고, 먹을 수 있는 먹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나한테도 먹이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그것이 무엇일까 감도 잘 안 잡힌다. 어쩌면 나와 반대되는 사람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감정이란 것은 잘 알다가도 모르는 놈이었다. 소나기처럼 갑자기 오다가 그치기도 하고, 나를 사형대 위에 세우기도 하며 광활한 하늘 위의 구름과 우주의 별처럼 반짝이기도 하고, 나를 불에 태우기도 한다.
긍정과 부정을 넘나들고, 생각을 복잡하게 해 머릿속을 공격하기도 하지만 감정표현은 확실하게 하는 게 좋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감정이 문을 걸어 잠그기 전에 말이다.
감정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충분한 고민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해 보았다. 여전히 나아지지는 않는다. 더욱 멀어지는 것 같으면서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아니 어쩌면 감정과 생각이 한층 깊은 곳에서 잊힌 상태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열쇠는 이미 쥐고 있는 상태지만 열쇠를 찾고 있는 것일지도.
나 자신을 잃어가고, 나 자신이 없어진다. 어느 한 곳에 박혀 있는 불안이란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당장은 아니다. 아니면 부정하고 싶은 것인가. 아니, 적어도 부정의 때가 타긴 했나 보다.
그럼에도 부정의 때도 벗기고 감정의 불씨도 지피려면 지금 할 수 있는 건 남들과 같은 평범함이 답 일 것이다. 여러가지 복수정답이 있겠지만, 평범하게 감정을 확실히 전달하다보면 견뎌내지면서 자의적으로 깨달음을 얻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