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돌아왔다

by 도토리

"엄마 나 농구 갔다 올게." 저녁을 먹자마자 아이가 농구를 하러 나가겠다고 했다. 다른 때였으면 잘 다녀오라는 말만 했을 텐데 그날은 나도 함께 가고 싶어 엄마도 같이 가도 되냐고 물어봤다.

"그러던지." 환대의 말은 아니었지만 함께 가도 좋다는 허용의 말 역시 내게는 오랜만의 반가운 말이라서 냉큼 따라나섰다. 사춘기 아들을 둔 엄마들은 사실 이런 작은 긍정의 말에도 가뭄에 단비가 내리듯이 기뻐한다.


중학생이 된 뒤로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는 나와 나란히 걷는 것도 어색해했다. 외출하면 나란히 걷다가도 자꾸 어긋나게 걸어서 혹시 엄마랑 다니는 게 창피한 거냐고 물었었다.

"그게 아니고, 내 나이에는 엄마랑 잘 안 다녀. 길거리 봐봐. 다 친구들이랑 다니잖아." 아이는 답을 하면서도 불편해 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만 해도 항상 손을 잡고 같이 다녔던 아이가 나란히 걷는 것도 불편해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날 처음 해봤다. 서운했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느낄 수 있는 여러 감정 중 하나라고 생각하고 나를 위로했다. 그렇게 우리는 2년이나 조금씩 어긋나게 걷기 시작했다.


오늘은 달랐다. 아이는 내 옆에서 남자친구처럼 나란히 걸으며 학교 이야기를 종알종알 들려줬다. 중3이 되면서 만난 친구 이야기, 선생님들 이야기. 며칠 묵언수행이라도 한 사람처럼 아이는 내가 모르는 다양한 이야기를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너 사춘기 끝난 거야?" 달라진 아이 모습이 조금은 어색해서 물었다. 아이는 거의 끝나가는 것 같다고 했다. 이의 목소리를 다시 많이 듣게 될 수 있을 것 같아 기쁜 마음이 들었다. 아이와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 순간을 나는 많이 그리워하 있었다.


함께 도착한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는 농구를 하고 나는 달리기를 했다. 나이가 들어 체력이 떨어지는 엄마와 체력의 정점을 만들어 가고 있는 16살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운동은 거의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함께 농구나 축구 같은 것을 해보려 했었지만 할 수 있는 어떤 운동을 해도 일단 급이 달랐다. 가끔은 '내가 엄마가 아닌 아빠였다면 달랐을까?' 하는 슬픈 마음도 들었다. 달리는 게 힘들어 관둘까 하다가도 어쩐지 아이가 나를 보고 있을 것만 같아서 그 앞을 지나치는 순간에는 더 빠르게 달렸다. 아이 앞에서 뭐든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게 엄마 마음이다. 각자의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편의점으로 향했다."먹고 싶은 거 다 골라." 편의점에서는 늘 통 큰 엄마인 내 말에도 아이는 아기 때부터 그랬듯이 음료수 하나 고르고 만다. 편의점 상품진열대를 같이 거닐며 아이가 어릴 적 좋아했던 과자들을 가리키며 우리는 잠시 추억에 빠졌다.


그 뒤로 몇 주를 살펴보니 아이는 학원 시간이 여유가 있는 수요일 저녁에 나가곤 했다. 아이가 운동을 나간다고 하면 나도 매번 따라나섰다. 같이 가도 되냐는 말도 없이 "나도 가야지!" 하면서 아이 뒤에서 서둘러 챙기곤 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었다면 오래된 만화 <톰과 제리>에서 제리를 쫓는 톰으로 보였을 만큼 저녁을 먹고 나른한 몸을 총알처럼 일으켜 따라 나갔다. 어쩌다 이렇게 우리는 자주 수요일 저녁 함께 운동을 하고 있다. 아이와 나 사이에 조금은 늘어져 있던 끈이 조금씩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며 가까워지는 수요일이다.

각자의 시간이면서도 함께하는 시간이기도 한 이 시간을 아이도 나처럼 좋아하고 있을까?

"너 중간고사 빨리 끝나서 수요일에 같이 운동하러 갔으면 좋겠다." 공부하는 아이 뒤에서 중얼거렸더니 아이가 씩 웃었다.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다가 어느 순간 한쪽 극의 방향이 난데없이 바뀌어져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좁힐 수 없는 거리가 느껴졌던 지난 시간이었다. 자꾸 내 관심과 노력이 튕겨져 나올 때마다 속상했다. 사실 부모도 아이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그때가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이제는 조금씩 다시 방향을 내게로 틀어주고 있다. 매번은 아니지만 그래도 흔들흔들 거리며 내게로 온다.


나는 수요일마다 아이와 작은 행복을 모으기 시작했다. 함께 걷는 짧은 길에서 제철의 행복을 느끼고, 서로의 관심사나 응원의 말을 건넨다. 아이와 함께한 지난 모든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얼굴에 미소하나 이는 정도의 작은 순간의 행복들이 나를 살게 하고 지켜왔다는 걸 안다. 작은 기쁨은 행복으로 이어지고 그 행복은 어려운 상황에서 꺼내 쓸 수 있는 삶의 연료가 되었다. 잘 산다는 건 어느 책의 한 구절처럼 결국 좋은 순간들을 잘 기억해 두는 일임을 이제는 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