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에는 곧잘 울적한 기분이 든다. 집에 가면 다시 저녁 준비와 집안 일로 쉼이 없어서다. 아이랑 둘만 살다 보니 모두 나의 몫인데 해가 갈수록 몸도 마음도 버겁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숨길 수가 없다. 밥은 제때 제대로 먹어야 한다는 남다른 고지식함을 가지고 있어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면 때를 놓치지 않고 저녁 식사를 차린다.
"저녁으로 뭐 먹고 싶어?"
"오늘은 내가 엄마 저녁 차려줄까?"
"정말? 할 수 있겠어?" 아이의 제안은 아이가 처음 엄마를 소리 내 말했을 때처럼 내 머리를 정지시켰다.
"지난번 엄마랑 했던 볶음밥 해줄게"
그렇게 아이는 요리를 시작했다. 사부작사부작 도마 위에서 대파를 썰고 김치를 잘게 다지는 아이의 손놀림은 제법 익숙했다. 파기름 냄새가 여느 때보다 더 진하게 느껴졌다. 잘하고 있나 염려되어 아닌 척 싱크대 쪽으로만 가도 아이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며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엄마는 쉬고 있어."
아이는 나를 위한 요리를 하고 어쩌다 할 일이 없어진 나는 오랜만에 마음이 바빠 잘 듣지 못했던 라디오 방송을 틀었다. 곡명도 모르는 노래에도 마음이 활짝 열린다. '이런 여유로운 저녁이라니!.' 여유를 즐기다 문득 가족 중에 부모님을 빼고 내게 음식을 손수 만들어준 사람이 있었나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부모님 말고는 아이가 유일하게 나를 위해서 한 끼를 차려 주는 사람이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소리 하나하나에 온몸의 세포들이 반응한다. 이 소리는 프라이팬에서 접시로 옮겨 담는 소리다. 이제 다 됐구나 싶어 일어서려니 아직 밥 위에 올릴 계란프라이가 안 됐다고 아이는 나를 다시 앉게 한다. 아이가 음식을 내려놓으며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계란이 노른자가 터져버려서 모양이 안 예쁘네."
아이가 식탁에 차려낸 김치볶음밥은 한눈에도 먹음직스러운 색과 향을 가지고 있었다. 나름 접시에 먹음직스럽게 담아내어 입안에 침이 고였다. 아이가 아쉬워한 노른자가 터져버려 납작해진 계란프라이는 4 등분되어 위에 놓여 있었다.
"와.. 진짜 맛있다. 엄마가 한 볶음밥보다 훨씬 맛있는데?" 요란한 과장을 보태 아이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려는 의도를 숨기려고 했었는데 이게 뭐지? 정말 맛있었다. 아이의 스타일 대로 햄을 듬뿍 넣어서 그런가? 아이에게 정말 맛있다고 말해주니 아이는 정말 맛있냐며, 엄마가 만든 것보다는 아닐 거라며 연신 수줍어했다. 사실 더위에 저녁을 거르거나 간단히 먹을 생각이었는데 아이가 차려준 볶음밥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다 먹은 접시를 들고 방에 있는 아이에게로 갔다.
"이것 봐봐. 엄마 다 먹었어! 고마워" 아이의 흡족한 미소에서 오늘은 언젠가 내 인생에서 꼽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의 후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가 차려준 한 끼의 식사로 배가 든든하니 뭐라도 더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저녁시간이었다. 에너지가 가득 찬 채 2라운드를 시작하는 게임 속 캐릭터처럼 생기 넘치는 내가 됐다. 한 끼의 식사는 내게 사랑을 표현한 아이의 방법이었다. 더운 날씨에 걸어오느라 이마와 콧잔등에 맺힌 땀방울, 조금은 멍한 눈빛으로 물을 들이켜는 나를 아이가 돕고 싶었던 것 같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아이가 변하고 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변하지 않고 있는 게 있었다. 나를 아끼고 걱정하는 마음. 아이가 어릴 적 힘든 시기를 건널 때 입맛도 없고 아이의 밥만을 겨우 챙겨 먹이던 시절, 맛있는데 엄마도 먹으라고 입 앞에 한 수저를 기어코 가져다 대던 그 꼬마의 마음이 여전히 아이 마음속에는 숨어 있었다. 한 끼의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