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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Oct 28. 2021

아이의 공간

12살 지구인 이야기(27)

가을을 도둑맞았다고 할 만큼 이번 가을은 유달리 늦게 왔고 그래서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가을맞이라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런 가을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나는 매번  아이의 가을 사진을 바라보며 가을이 왔음을 실감한다.

주말이면 의식처럼 찾아가는 할머니 집에서 아이는 온몸으로 가을을 느낀다. 아이는 매년 가을 할머니 집 감나무에서 감을 딴다. 어릴 때는 자기 키보다 큰 감나무를 올려다보기만 하고, 감 위에서 새가 쪼아 먹고 있어도 지켜보기만 할 수 없었던 아이는 이제 키가 닿지 않는 곳에 달린 감을 낮은 사다리를 놓고 스스로 딸 수 있게 될 만큼 자랐다. 하루는 키가 웃자란 잔디를 할아버지와 같이 자르고 치우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할머니가 심은 고구마를 땅에서 캐내기도 한다.

"할머니네 집에서 하는 일들 힘들지 않아?"

"힘들지 않아. 오히려 스트레스가 풀려. 엄마도 해봐."

며칠 전 아이와 그림책을 함께 읽다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길래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은 어디니?"

"할머니네 집!" 아이가 주저 없이 말한다.


장소는 우리가 그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만큼만 특별해진다고 한다. 세상에서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곳, 할머니네 집은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주는 곳이기도 하지만, 아이는 스스로 그 공간을 더 특별한 곳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자기 스스로 택배 상자나 나무 조각들을 가지고 뭔가를 만들기도 하고, 화살을 만들어 날아다니는 새들도 쏘아보고는 한다. 족제비 덫을 만든다며 돌을 쌓아 나뭇가지와 풀로 덮어 함정을 만들더니 왜 족제비가 하필이면 이곳은 안 지나가는 것인지 안타까워한다.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와이즈베리, 2019)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위로해 주고 즐겁게 해주는 그런 공간 리스트가 있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위로받고 더 빛난다고 했다. 아이에게 주는 공간의 위로는 더 크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오롯이 자신일 수 있던 그 곳. 열두 해 째 그런 공간에서 가을을 나는 아이의 유년은 그 어느때 보다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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