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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Jan 16. 2022

차선이 만든 풍경

제주에서 나고 자라면서 한 번도 눈이 온 한라산을 등반한 적이 없다. 지난주에 온 눈으로 한라산은 제주시 어디에서 보아도 하얀 눈을 덮고 아름다웠다. 눈이 온 한라산 등산은 그렇지 않을 때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는 말을 지인에서 수년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이번에는 꼭 한번 해보자 다짐하고 주말 등산에 나서기로 했다. 미끄러지지 않게 아이젠과 폴, 등산용 장갑을 사고 오랜만에 등산화까지 꺼내고 단단히 준비한 후 한라산으로 갔다. 하지만 등산로 한참 전부터 차가 몰려 밀리기 시작했다. 좀처럼 속도를 낼 수 없는 상황에서 슬슬 불안감이 밀려왔다.

'여기서부터 막히면 등산로 입구에 주차하는 것은 어렵겠는걸?'

나뿐만 아니라 친구도 같은 생각인 듯 운전 중 서서히 말이 없어진다.

역시나 등산로 입구에 다다르자 갓길 주차로 차는 더욱 속도를 내지 못했고, 등산로로 들어가는 길목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입구를 막아놓고 있었다.

"차를 돌려서 내려갈까?"

같이 갔던 친구와 일단 등산을 포기하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려고 했으나 차를 돌리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어떻게 할까? 그냥 돌릴까? 앞으로 가볼까?"

"돌리는 건 어렵겠다. 그냥 앞으로 가보자."

그렇게 친구와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앞으로 무작정 운전을 계속해 나갔다.

복잡한 등산로 입구를 지나니 불과 몇 분 전과는 달리 도로가 뻥 뚫리고 다른 풍경이 펼쳐져 다른 세계로 순간 이동을 해온 느낌마저 들었다.

몇 분을 더 가니 눈앞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설경이 펼쳐졌다. 땅에 소복이 쌓인 눈과 앙상한 나뭇가지에 눈이 내려앉은 새 하얀 세상에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겨울왕국 노래가 울려 퍼질듯한 풍경이었다. 원래 가기로 했던 곳을 가지 못하고 마주한 이 경치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친구와 잠시 차에서 내려 발이 푹푹 빠지는 눈 위에 서보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하얀 나무 위를 넋을 놓고 올려다보았다.

"여기 제주 맞지?"

"사진 찍으면 핀란드에 왔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데?"

두 제주 토박이는 한라산 등반은 애초에 없었다는 듯 한껏 눈으로 마음으로 설경을 담았다.

 

'가고자 했던 길을 가지 않았을 뿐인데, 아니 가고자 했던 길을 가지 못했는데 이런 행운이 오기도 하는구나.'

순간 차선이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그동안 내가 가고자 하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도 그 자리는 다른 선택으로 채워졌고 그 선택이 도리어 나에게 더 많은 경험을 주는 새로운 길로, 새로운 풍경이 되어 주었다. 삶에서 내 차선들이 열어주는 또 다른 길들에  조금은 더 주저함 없이 발을 내디뎌 보기로 했다. 그 차선들이 모여 최선을 만들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분 좋은 느낌이 드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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