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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Jan 23. 2022

겨울 한라산 등반기

한라산에 또 눈이 내렸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라산을 보니 눈이 짙게 쌓인 게 보인다.

"한라산 갈래? 또 눈이 왔대."

"그래 가자." 밑도 끝도 없이 꺼낸 말인데 아무렇지 않게 대답해주는 친구가 참 고맙다. 운동이나 등산은 장비를 갖추고 시작한다지만 나 같은 겁쟁이는 든든한 친구를 먼저 옆에 두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상인 백록담까지 이를 수 있는 등산로는 하루 500명 예약제라서 갈 수가 없어 어리목코스로 가보기로 했다.

아침 일찍 서둘러 한산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한라산을 마지막으로 가본 게 언제였더라?' 햇수를 헤아리니 무려 15년 전이다. 15년 동안 한 번도 오를 생각을 안 했던 한라산이 내 눈앞에 하얀 눈을 덮고 서있다. 뭔가 대단한 미션을 가지고 온 느낌이 들면서도 15년 만에 등산하는 내가 이런 눈 덮인 산을 끝까지 오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아!' 시작부터 아이젠을 등산화에 끼우는 게 일이다. 난생처음 하는 일은 뭐든 어려운 게 분명하다. 앞뒤를 잘 당겨 신발에 맞게 끼우니 이것부터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라산 어리목 코스는 등산로 입구부터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뽀도독뽀도독 소리가 난다. 여러 명이 좁은 등산로를 따라서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나는 소리는 가끔 들리는 까마귀 소리와 어울려 편안함을 준다.

불멍, 바당 멍 같은 것들이 뇌를 잠시 쉬게 해주는 것처럼 반복적인 소리가 만들어내는 이 소리가 등산하는 나의 뇌를 오롯이 걸을 걸음에 집중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편안함도 잠시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됐다. 눈이 오지 않은 한라산 등산로는 보통 나무 계단이나 돌로 되어 있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하얀 눈으로 만들어진 오르막이 주는 느낌은 참으로 생경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앞사람이 만들어 놓은 조금은 내딛기 쉬운 곳으로 발을 내디뎌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장갑을 꼈음에도 손끝이 시려서 살짝 움츠려 든 순간이 있었지만 금세 몸이 데워지며 어려움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나무 숲길이 아닌 짙은 하얀 눈으로 덮인 동산이 펼쳐진다. 등산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넋을 잃고 풍경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고 쉬어간다.

하지만 이곳은 시작이었다. 계속되는 너른 하얀 설경은 내 상상 이상이었다. 스키장 슬로프가 주는 하얀 느낌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면 내 밑으로 제주시가 보이고 은 구름대가 보였으며 위로는 파란 하늘이 보였다. 한라산은 말 그대로 찬연히 빛이 나며 신들이 지상의 인간을 내려다볼 때의 느낌은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제비 동산과 만세동산의 설경을 지나 한라산 윗세오름에 도착했다. 윗세오름 이정표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 가지고 온 컵라면으로 추위를 녹이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가만히 앉아서 차를 마시고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몸을 녹이려고 앉았으나 한라산의 날씨는 순간순간 변화하는지라 구름이 짙게 깔리고 금세 쌀쌀해져 서둘러 하산을 하기로 했다.


마침 내가 가는 날이 4월에 방영될 예정이라는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 촬영 중이었다. 촬영 때문에 잠시 길이 막혀 기다려야만 했다. 기다리던 사람 중 한 명이 스텝에게 물었다.

"누가 주연인 드라마예요?"

"너무 많아요. 찾아보시는 게 나을 거예요."

스텝이 대답하기 귀찮아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실제 하산하고 찾아보니 엄청난 배우들이 한 번에 나오는 드라마였다.  이병헌, 신민아, 김우빈, 한지민, 차승원 등등.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물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보았냐고. 아무도 못 봤다. 봤는데도 지나칠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서있었고 다 같은 모습이었다. 등산복에 모자 선글라스 마스크. 이 높은  곳까지 올라와서 좋은 풍경을 담고자 촬영하는 사람들의 애씀이 느껴졌다. 기껏해야 한 두 장면, 몇 스틸뿐일 텐데도 이 수많은 사람이 산을 등산하며 장비를 세팅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각각의 직업군마다 다 엄청난 노력이 드는구나 싶으며 드라마가 한라산의 기운을 받아서 꼭 흥하길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은 오르는 길과는 또 다른 풍경과 느낌을 선물해줬다. 오르막길에서는 오르느라 보지 못했던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고, 오를 때와는 다른 몸의 근육들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내려가는 속도가 사람마다 다른지라 뒤에서 재빠르게 내려오는 사람의 발소리에 괜히 긴장이 됐다. 그 속도에 맞춰 나까지 서두르니 허리에 무리가 감이 느껴져 잠시 옆으로 비켜 자리를 내어주었다. 역시 사람은 자기 속도대로 가야 된다.

왕복 6시간이 걸리는 한라산 어리목 등반을 4시간 만에 마쳤다. 일 년여 동안 꾸준히 해온 운동이 빛을 발한 것 같아서 제법 내가 멋져 보였다. '아직은 튼튼하구나!' 스스로에게 칭찬 소나기를 쏟아부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리 모두에겐 뭔가 살아갈 의지가 될만한 밝고 긍정적인 신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오늘 나는 친구와 또 한 번 서로에게 신화가 되어줄, 한해를 힘차게 살아낼 수 있는 밝은 신화를 이렇게 하나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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