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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Nov 19. 2022

여럿의 내가 모인 나

몇 해전 교대에 영어 강의를 나간 적이 있었다. 당시 인연이 있던 교수님이 오랜만에 연락 오셔서 특강을 부탁하셨다. 오랜만에 영어 강의를 하려니 준비할 것이 많다. 한동안 영어를 가르칠 일이 없었다 보니 준비하는 자료부터 낯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괜히 하겠다고 했나? 걱정도 밀려온다.

강의를 하러 가는 길. 이 길은 내게 한결같은 나를 만들어 낸다. 운전하면서도 강의의 흐름을 그리고 영어 표현을 소리 내서 내가 임용고시 수험생이 되어 말해보기도 한다. 한글의 자음 모음에 최적화된 입은 어색한 음을 토해낸다. 차창밖으로 보 해가 지기 시작한다. 돌아갈 때 이 길은 깜깜해진다.


몇 년 만에 학교에 들어서니 강의실은 내가 대학생일 때나 대학원을 다닐 때나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이다. 강의실을 오가며 걸었던 계단과 복도, 강의실 문까지. 그 문을 열면 그 시절의 나를 만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잊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추억에 잠기니

치열하게 살았던 내 30대와 만나게 된다. 4살짜리 아이를 부모님께 부탁해가며 저녁마다 왔던 박사과정 생활, 공부가 다 끝나시작했던 강사 생활, 어둠이 잔뜩 내려앉은 교정을 나와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가 자는 새벽에 일어나 과제를 하며 30대를 살았다. 지금 돌아보면 어떻게 그 시절을 지나왔는지 아찔하다. 젊었었다는 말로 설명 안된다.


한 번은 친한 친구가 그동안 그렇게 공부한 거 아깝지 않냐고 물었다. 당연히 아깝다. 인 돈과 시간이 아까운 게 아니라 내게 쉼을 주지 않고 살았던 게 아깝다. 조금 더 천천히 숨도 고르며 살 것을 마치 그때가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쉼 없이 버티며 려가기만 한 것이 타깝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내 몸이 기억하고 있다. 넌 뭐든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가방끈이 길어진다는 것은 내 인내심이 길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꾸역꾸역 해내다 보면 끝은 와 있고 끝난다. 그리고 가끔 이렇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전해주는 기회가 생겨 학교에 가끔 와서 추억에 잠긴다. 하나하나의 기억들이 한 사람의 삶을 이룬다면 내 삶은 꽤나 다채로운 것도 같다.


작가 임진아는 <좋지만 싫다>에서 내일이 주어지는 밤이 쌓이면 쌓일수록 여럿의 내가 모인다고 했다. 그렇게 모인 여럿의 드는 길이 어주는 길로 가다 보니 지금의 나를 만난다. 어떤 내가 좋은 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도 옳고 지금의 나도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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