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언어로 보는 민족의 뿌리
국가는 제도를 남기고, 민족은 언어를 남긴다.
정복의 역사는 무수한 국호와 관제를 지워버릴 수 있을지언정, 사람들이 서로를 부르고 삶을 나누던 말의 흔적까지는 온전히 없애지 못한다.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논하고자 할 때, 우리는 그들이 어떤 말을 썼는가를 가장 먼저 물어야 한다.
그 말은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그들만의 사고방식, 감정의 구조,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자, 때로는 그들 자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진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살되, 성곽과 의복은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르다.)
이때의 변진은 변한을 말한다.
겉모습은 같았으나, 그들의 말은 달랐다.
말이 다르다는 것은 곧 생각이 다르다는 뜻이며, 공동체의 심층 구조가 다르다는 증거다.
이는 진한과 변한이 단순한 마한의 지류나 분파가 아니라, 언어와 문화에 있어 명확히 구별되는 고유의 정체성을 지닌 독립 공동체였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러나 같은 『삼국지』는 이어서 이렇게도 적는다.
“其人與秦時亡人相冒而雜處 故謂之辰韓也.”
(그들은 진나라 망명자들과 섞여 살았기 때문에 ‘진한’이라 불린다.)
이는 마치 진한이 진(秦)의 후예인 양 묘사하는 문장으로, 중국 사서의 전형적인 중심주의적 서술 방식을 드러낸다.
즉, 진한의 명칭과 정체성을 외래에서 유래된 것으로 설명하며, 자생적 공동체로서의 주체성을 간과하려 한다.
본 장에서는 이러한 사료들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진한의 언어적 독자성과 그 정체성을 복원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신라로 이어지는 언어의 계보와, 대한민국에까지 이어진 민족적 기반의 기원을 구체적으로 밝힐 것이다.
진한 어는 존재했는가? 그것은 과연 신라어의 전신이었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서 출발하여, 사라졌으나 남겨진 말들의 잔해 속에서 정통의 언어, 그리고 민족의 근원을 되짚어 나가게 될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진한과 변한의 관계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살되, 성곽과 의복은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르다.)
이 문장은 매우 짧지만, 역사적 해석의 관점에서는 결정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잡거(雜居)’라는 표현은 진한과 변한이 지리적으로 인접했거나 일부 혼합되었음을 시사하지만,
이어지는 “언어와 풍속이 다르다(言語風俗有異)”는 표현은 두 집단이 문화적·민족적으로는 분명히 구별되는 실체였음을 암시한다.
우선 ‘언어’는 단순한 방언의 차이를 넘어, 사고와 체계, 나아가 공동체 내부의 정체성 구조를 반영하는 요소다.
의복이나 성곽이 비슷했다는 점은 기술이나 재료 문화의 유사성을 말해줄 뿐이며,
그들만의 말과 풍속은 공동체 내부의 세계관이 달랐음을 보여주는 가장 근원적인 단서다.
이는 진한과 변한은 마한의 소국집단이 아니라,
각기 다른 언어 공동체로 자립적으로 존재하였음을 중국 사서조차도 인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즉, 『삼국지』는 진한과 변한이 외견상 비슷한 양상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삶과 언어, 풍속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였다는 점을 서술한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오늘날 학계에서도 중요한 해석의 단서로 활용된다.
특히 진한어가 고유의 언어 체계를 가졌다는 점, 그리고 훗날 신라어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고대 사료의 기초로 평가된다.
언어학적 복원은 쉽지 않지만, 이러한 사료에 기반하여 진한을 하나의 독립 언어권 공동체로 설정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한 접근이다.
결국 이 한 문장은 단순한 민족의 경계선을 넘어,
진한이 지닌 고유한 민족적 실체와 문화적 독립성의 증거로 기능한다.
그들은 같은 땅에 살았으되, 다른 말을 하고, 다른 춤을 추며, 다른 삶을 살았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진한의 언어를 단서 삼아, 그들이 누구였는가를 다시 묻게 되는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진한의 명칭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긴다.
“其人與秦時亡人相冒而雜處 故謂之辰韓也.”
(그들은 진(秦) 나라의 망명자들과 뒤섞여 살았기 때문에 ‘진한(辰韓)’이라 불렸다.)
이 구절은 겉보기에 진한의 기원을 외래 이주민에게 두는 듯한 인상을 준다.
즉, 중국 내부의 진나라 사람들이 동쪽으로 이주하여 진한 사회에 섞였고,
그로 인해 ‘진(秦)’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진한’이란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중국 사서가 가진 전형적인 중화 중심주의적 세계 인식에서 비롯된 해석이며,
진한 내부의 실제 정체성과는 무관한 외부적 명명(命名)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이 구절은 진한인들이 스스로를 ‘진한’이라 불렀다는 증거가 없다.
중국 사서의 기술 방식에 따르면, ‘진한’이라는 명칭은 그들 외부에서 붙여진 호칭이며,
그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진나라 유민과의 관련성을 과장하거나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더불어, 이 구절은 정체성의 실질 요소인 언어, 풍속, 공동체 문화 등과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전에 언급된 “言語風俗有異”라는 구절이 진한의 자생성과 독자성을 보여주는 데 비해,
“與秦時亡人...”이라는 구절은 단지 명칭의 기원, 즉 외부인이 붙인 이름의 어원을 설명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구절은 진한의 실체를 이해하는 데 있어 혼선을 유발하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다.
즉, 진한의 실존을 ‘진(秦) 나라 유민의 후손’으로 환원시키려는 서술은
자체 문명성과 민족 정체성을 축소·종속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진왕 = 진한의 왕’이라는 오해와도 같은 맥락에서 작동한다.
후대 해석자들이 문자적 유사성에 이끌려 진한을 외래 세력의 일부로 잘못 해석하게 되는 오류의 기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 구절을 읽을 때 유의해야 할 것은,
‘중국 사서의 기원 서술은 반드시 그 시대의 인식론과 권력관계를 반영한다’
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 문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깔린 이데올로기와 명명권의 주체를 파악하는 것이 진한사의 복원을 위한 첫걸음이다.
진한은 외부 이민에 의해 형성된 주변 집단이 아니라,
고유의 언어와 풍속, 공동체 문화로 자생적 발전을 이룬 내부 정체성의 공동체였다.
그 중심에서 사로국이 형성되었고, 그 흐름은 단절 없이 신라로 이어졌으며,
우리는 바로 그 자율성과 주체성의 흔적을 언어라는 렌즈로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삼국지』가 남긴 짧은 구절—“言語風俗有異”—은 단지 두 문화의 차이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문장은 언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암시하며,
진한이 독자적인 언어 체계를 지닌 고립된 혹은 독립된 언어 공동체였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진한어는 실존 했는가?
만약 실존했다면, 그 언어는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잔재라도 남겨주었는가?
진한어에 대한 직접적인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이는 문자 기록이 없었던 진한 사회의 특성과, 후대의 신라가 한자문화권에 편입되며 고유어 표기의 전통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학적 방법을 통해 우리는 ‘존재했을 법한 언어’의 실체를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신라어다.
향가, 특히 삼국유사와 삼대목에 일부 기록된 신라계 고유어는,
조사·어순·음절구조 등에서 현대 한국어와도 일정한 연속성을 지니는 구조를 보여준다.
또한, 당시 사용된 향찰 표기 방식은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해 고유어를 기록하려 했던 일종의 문자 실험이자,
언어 계보 보존의 흔적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언어구조의 가장 오래된 기원을 상정해 보면,
신라어는 곧 사로국, 더 멀리 올라가면 진한어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가진다.
현대 언어학계에서도 진한어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알타이계 혹은 퉁구스계 어족의 일파로 보는 견해
한반도 남부 고유 언어로서 독립 어족으로 분류하려는 시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진한 어는 단순히 고대의 언어가 아니라, 고유의 사고방식과 공동체 질서를 반영한 일종의 ‘세계관’이었다는 점이다.
진한어가 신라어로 이어졌다는 가장 강력한 단서는 향가(鄕歌)에 있다.
향가는 단지 노래가 아니라, 신라 귀족 계층과 승려들이 고유어로 정서를 표현했던 문학 양식이다.
10구체의 규칙적인 구조,
주격·관형격 조사의 존재,
시제를 반영하는 어미 활용은
신라어가 단순한 구어체가 아니라 하나의 언어 체계를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향가의 주제는 대부분 삶·죽음·순환·애도 등 매우 내면적인 성찰을 담고 있는데,
이는 말의 구조가 곧 공동체의 감정 구조와 맞닿아 있음을 암시한다.
진한 어는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신라어를 통해 구조적으로 계승되었으며,
그 언어는 다시 향가를 통해 문학으로, 정서로, 기억으로 남았다.
이는 단절된 언어가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살아남은 언어였다.
진한어는 기록되지 않았고, 보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말은 공동체와 함께 살아 움직이며, 정치 구조, 관습, 사상, 감정의 흐름 속에 녹아들어 존재를 지속한다.
우리가 사로국과 신라의 제도를 살필 때,
그 언어는 제도의 틈새에, 법의 문장 사이에, 그리고 관직 명칭과 행정 체계 속에 은밀히 남아 있었다.
사로국은 진한 12국 중에서도 중심적 위치에 있던 정치체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모두 사로국이 ‘6촌 연맹체’를 기반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공동체는 혈연뿐 아니라 공통된 생활양식과 의례, 언어적 일체감을 바탕으로 통합되었다고 서술한다.
특히 사로국은 외부 정복이나 병합이 아닌 내부 연맹의 수렴을 통해 왕권을 성립시켰다.
이는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진한 고유의 체계가 외부에 의해 강제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즉, 사로국의 언어는 진한어의 중심 방언이자,
훗날 신라어로 직접 연결되는 정치적 언어의 기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지』에 따르면, 마한은 삼한 중에서 가장 크며,
목지국은 그 수도 역할을 하며 ‘진왕’을 옹립해 삼한을 대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구조는 의례적 상징체계에 가깝고,
진한이 마한에 종속되었다는 실증적 근거는 희박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목지국과 마한의 정치 계보는 결국 백제국에 흡수되며 단절되었다는 점이다.
반면, 진한은 사로국이라는 실질적 정치 주체를 유지했고,
그 사로국은 내물왕을 거치며 고대국가로 발전,
단 한 번의 단절도 없이 ‘신라’로 이어졌다.
이는 언어와 정치 구조의 연속성이 함께 보장된 경우이며,
정통이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단절 없는 언어-정치 공동체는 그것만으로도 정통의 중요한 조건이 된다.
신라의 대표적 제도인 골품제와 화백회의는
단순히 귀족제나 귀속 정치의 산물이 아니라,
진한 공동체의 언어적·관념적 전통을 제도화한 구조로도 해석할 수 있다.
‘화백(和白)’은 말 그대로 뜻을 모은다는 의미이며,
이는 공동체 내부의 언어적 소통과 합의의 전통에서 비롯된 정치 방식이다.
즉, 말과 말 사이의 균형,
계층 간의 조율,
그 모든 것이 언어라는 기반 위에서 가능했다는 뜻이다.
진한의 언어는 신라의 사상으로, 정치로, 그리고 법으로 변주되었다.
우리는 제도를 읽을 때 말의 흔적을 읽어야 하고,
정책을 해석할 때 정체성의 뿌리를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는 ‘진한어’라는 말을 결코 들은 적이 없다.
그들은 사전을 남기지 않았고, 문법서를 쓰지 않았으며, 문자로 언어를 체계화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말은 반드시 문자로만 남는 것이 아니다.
말은 기억 속에 남고, 몸짓과 제도에 스며들며, 공동체의 질서와 감정의 구조로 잔존한다.
『삼국지』는 진한이 변한 과 언어가 달랐다고 했다.
그 짧은 문장이 하나의 민족 공동체가 지녔던 정체성의 증거가 되리라고,
염사치도 아마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한의 언어는 사라졌지만,
그 말의 구조는 신라의 노래에 남았고,
정치 제도에 깃들었으며,
골품의 위계와 화백의 합의 속에 살아 있었다.
그 말은 언젠가 “신라어”라고 불렸고,
그 신라어는 고려어와 조선어를 지나,
오늘날 우리가 쓰는 말의 가장 오래된 골격으로 남아 있다.
진한은 마한‘진왕’의 피지배 지역이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말했고, 스스로 다스렸으며, 스스로 계승되었다.
그 말은 정통이었고, 그들은 그 정통의 첫 문장을 발화한 이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직접 들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말이 ‘달랐다는 사실’이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결코 잊힌 공동체가 아니다.
그들의 언어는 곧,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정체성의 언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