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당신의 고통은 박수받을 만한가요?
※ 이 글은 영화를 본 분들,
혹은 영화는 보지 않더라도 그 감정의 결을 느껴보고 싶은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줄거리와 장면에 대한 해석이 포함되어 있으니, 감상 전엔 살짝 주의해주세요.
우리는 다시, 무대 위로 올라선다.
이번에는 커튼 뒤 어둠이 아니라,
무대 조명 아래 휘몰아치는 박자 속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그 빛은 온전한 찬란함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으로 불타오른 강박,
찬사로 포장된 훈육,
그리고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폭력이다.
어떤 박수는 칭찬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어떤 연주는 감동이 아니라 절규였다.
그리고 어떤 무대는, 누군가의 삶을 태워야만 완성되었다.
데이미언 셔젤의 『위플래쉬』는 음악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성취와 학대, 재능과 광기, 헌신과 파멸 사이의 경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조율되며, 결국은 박수 소리로 덮이는지를 보여주는
잔혹한 실험실이다.
“Good job.”
이라는 말은
여기선 칭찬이 아니라 최후통첩이다.
그는 음악을 포기했고, 그 상처를 예술로 바꾸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음악이 그를 밀어냈고, 그는 그 쫓겨난 자리에서
영화라는 악보 위에, 다시 드럼 스틱을 들었다.
데이미언 셔젤.
그는 학창 시절 재즈 드러머를 꿈꿨다.
프린스턴 고등학교에서 스튜디오 밴드에 지원했고,
매우 엄격한 스승 아래에서 드럼을 배웠다.
그러나 ‘뛰어나지 않다’는 평가.
그리고 그 말 한마디는, 꿈을 내려놓기에 충분했다.
셔젤은 드럼을 그만두었고, 결국 공부에 매진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한다.
그곳에서 그는 저스틴 허위츠를 만난다.
미 하버드 재학 시절,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던 룸메이트.
셰젤이 시나리오를 쓰고, 허위츠는 음악을 맡았다.
둘은 그렇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음악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워갔다.
《위플래쉬》는 이 둘의 협업이 만들어낸 첫 번째 절규이자 연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플래처는 셔젤이 직접 만났던 그 스승의 페르소나이며,
앤드류는 스스로가 되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또 다른 자아다.
결국 《위플래쉬》는 한 청년이 꿈을 잃고 떠난 자리에서
다시 그 꿈을 잔혹하게 재현해 내는 영화다.
실패에 대한 복수이자, 실패를 받아들이는 방식의 선언.
그의 연출은 치밀하고 통제되어 있다.
모든 장면은 박자와 호흡으로 편집된다.
셰젤은 영화를 연출한다기보다 지휘한다.
배우는 연기하지 않고 연주하며, 관객은 감상하지 않고 속박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의 영화는 늘 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장르라는 점이다.
그것이 재즈든, 우주든, 시네마든.
《위플래쉬》는 그의 첫 선언이었다.
완벽주의란 무엇인가.
그 끝은 어디인가.
그곳에 도달하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는 말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한 소년은 손에 피를 묻힌 채 박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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