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말을 잃는 방식 – 루빈과 루비라드르의 모순
『미드소마』 속에서 가장 기묘하고도 성스러운 존재는,
말이 없는 예언자 루빈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선택된 자’로 길러졌다.
그러나 그 선택은 축복이라기보단, 계획된 탄생이었다.
의도된 근친 교배의 결과, 공동체는 그를 ‘신의 그릇’이라 부른다.
말 대신 그림을 남기고, 그 그림은 예언서인 루비라드르로 보관된다.
하지만 그 예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 말이 없는 예언자, 해석되는 신
루빈은 말하지 않는다.
그의 손에서 나오는 것은 형태 없는 선, 색, 점과 무늬.
그의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 무언가를 해석하는 자들이 있다.
장로들이다.
“우리는 그가 남긴 계시를 해석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해석은 오직 그들만이 할 수 있다.
계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무엇이라 말하느냐만이 중요하다.
2. 신은 만들어지고, 신의 뜻은 조작된다
루빈은 신과 가장 가까운 자로 추앙받는다.
하지만 실상 그는 신이 아니라, 신의 껍질이다.
그는 말이 없고, 자기 의지도 없다.
오직 해석당하는 객체, 조형된 신성, 권위의 도구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루비라드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모든 말은 해석자의 입에서만 나올 뿐이다.
3. 숭배와 침묵 사이의 아이러니
신탁은 신성하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인 권력을 담고 있다.
계시가 해석되어야 할 때,
그 해석은 언제나 권력자의 것이다.
『미드소마』는 이 구조를 정면으로 보여준다.
말이 없는 예언자,
그림으로 남겨진 계시,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해석자의 권력.
그 신성의 구조는,
결국 해석될 수밖에 없기에 조작될 수 있는 신의 형상이다.
그래서, 루빈은 신이 아니다
루빈은 선택된 존재였지만, 동시에 침묵을 강요당한 신의 인형이었다.
루비라드르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말이 가능해지는 책이다.
그리고 그 모든 말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정해진다.
신은 말을 잃었고, 인간은 그 빈자리를 권력으로 채운다.
“신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신의 이름을 말하는 사람들만 존재하는가?”
『미드소마』는 그 질문을
말 없는 예언자의 눈을 통해 조용히 되묻는다.
『미드소마』는 공포영화처럼 시작되지만,
결국은 애도와 선택, 공동체와 파괴, 감정과 폭력의 서사로 마무리된다.
감정은 어디서 끝나고, 폭력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가족은 어떻게 무너지고, 또 어떻게 다시 조형되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아니면 신을 말하는 사람만 존재하는가.
아리 애스터는 그 모든 질문을 하얀 꽃과 밝은 햇살 아래 놓고 이야기한다.
1. 가족의 상실 – 감정이 붕괴된 존재의 시작
대니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가족 전체를 잃는다.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감정의 기반 자체가 사라지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슬픔은 어떤 말로도 위로되지 않는다.
그녀가 진짜 절망하는 순간은
사망 소식이 아니라, 그 고통을 공감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 애도의 부재는 존재의 부재가 된다.
2. 의미 없는 관계 – 공감 없는 사랑은 구원이 아니다
대니와 크리스티안의 관계는 사랑이 끝났음에도 이어지고 있는 관계다.
그는 더 이상 그녀를 바라보지 않지만,
떠날 용기도, 남을 이유도 없다.
그 관계는 공감 없는 책임감, 감정 없는 동정심,
그리고 결국 상실을 더 깊게 만드는 정서적 방치다.
아리 애스터는 말한다.
“사랑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는 것이다.”
3. 공동체의 모순 – 포용하는 듯하며 동화시키는 세계
호르가는 대니에게 새로운 가족, 감정의 안식처처럼 보인다.
그들은 그녀의 슬픔에 함께 울고,
그녀의 기쁨에 함께 환호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감정이 아닌, 공동체의 감정을 복제하는 구조다.
그녀가 메이퀸이 되는 순간, 그녀는 선택받은 자가 아닌
선택되어야만 하는 역할에 갇힌 존재가 된다.
그들은 함께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느끼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4. 자연의 얼굴 – 호르가의 자연주의는 진짜 자연인가
영화 속 호르가는 철저히 자연 중심의 공동체로 설계되어 있다.
낮에는 햇살이 쏟아지고, 꽃과 풀은 모든 공간을 채운다.
죽음조차도 순환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자연은 조작된 자연, 통제된 계절, 설계된 생태계다.
그들의 자연은 스스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의식과 숫자에 맞춰 리듬을 강요당하는 자연이다.
그들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흉내 내는 체계 속에서 자신을 절대화하고 있을 뿐이다.
5. 남성성의 폭력 – 대상화된 감정, 도구화된 여성
크리스티안은 영화 내내 대니를 정서적으로 방치한다.
그는 공감하지 않고, 단지 관계를 유지할 명분으로 그녀 옆에 머무른다.
그리고 그 역시, 호르가 공동체 안에서
생식의 도구, 제사의 제물로 역전된 대상화를 겪는다.
이 구조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게 가해졌던 대상화를
그대로 뒤집은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 누구도 주체가 되지 못하는 세계,
모든 감정이 목적에 봉사하는 구조를 드러낸다.
6. 종교의 모순 – 신은 말이 없고, 말은 권력이 된다
신은 직접 말하지 않는다.
말이 없는 예언자 루빈, 해석만 가능한 예언서 루비라드르.
공동체는 그 안에서 해석을 독점하며 권력을 정당화한다.
종교는 감정을 구원하지 않고,
감정을 의식 속에 배치한다.
신은 보이지 않지만,
신을 말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누가 살고, 누가 죽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결국 아리 애스터는 말한다
“슬픔이 가장 고요한 방식으로 조작될 때, 인간은 기꺼이 괴물이 된다.”
『미드소마』는 잔혹한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애도와 공감이 사라진 세계가 어떻게 꾸며지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의식이다.
대니는 가족을 잃고, 감정을 잃고,
공동체 안에서 다시 태어났지만,
그녀가 얻은 것은 진짜 가족이 아니라, 배역과 질서와 미소였다.
그 미소는 복수였고, 해방이었으며,
무너진 자아의 마지막 방어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대니의 미소로 아리 애스터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것은 구원이었는가, 아니면 또 하나의 연기였는가.
서도운의 시네마틱 레버리 [미드소마] fin.
표지: <미드소마> 공식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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