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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바람 붓

터줏대감 거위가 그리운 새벽

by 한명화

율동 호수에는 오랜 날들 터줏대감이었던 멋진 거위가 있었다

10여 년도 더 예전 호수공원 운동길에 스치듯 만났던 늘 손에 까만 봉투를 들고 다니시며 쓰레기를 줍던 노 신사분이 계셨다

언제나 그분의 손에는 까만 비닐봉지가 들려있었고 봉투는 늘 배가 불러있었다

꽤 큰 키에 체격이 있으신데 연세 때문인지 약간은 걸음이 불편해 보이셨는데 호수안 오리를 예뻐하시는지 가끔씩 먹이를 던져주곤 하셨다

10여 년도 더 먼 어느 봄날

오랜만에 햇볕도 쐴 겸 오후 2시경 호수공원 산책을 하고 있는데 그 어르신이 들고 계시던 상자를 내려놓으시는데 너무 예쁜 하얗고 노랗고 까만 아기 오리 10여 마리가 뒤뚱거리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처음엔 어리둥절 한지 서로 뒤뚱거리며 끽끽거리더니 그중 유난하게 키가 큰 아기오리가 있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잠시 후 내 눈을 의심케 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키가 큰 아기오리가 앞장을 서자 모두 뒤뚱거리며 줄을 서서 그 뒤를 따라 호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 뒤로 호수공원에 갈 때마다 아주 유심히 보게 되는데 키 큰 오리는 어느 사이 엄마 오리 역할을 하고 있었고 노 신사는 밥 먹자 이리 와라 하고 부르면 호수 안에서 놀던 아기오리들이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 노신사 주변으로 모여들어 먹이를 먹곤 했었다

노신사는 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아기오리를 가져다 놓았고 그 키 큰 오리는 오리가 아닌 거위의 본모습으로 호수공원의 터줏대감이 되어 노신사의 아기오리들을 잘도 키워내고 있었다

수년을 거치며 봄이면 아기오리의 엄마가 되었다가 가을이 오며 다 자랐다고 짝을 찾아 품을 떠나버리고 겨울이면 홀로 외로워 꺼위꺼위 오리들을 부르며 고개를 떨구던 거위 엄마는 다시 봄을 기다리는데 어느 봄부터 노신사와 아기 오리는 보이지 않았다

청둥오리들이 날아왔지만 거위와 놀아주지 않았고 가마우지도 찾아왔지만 거위는 외로웠다

아기오리를 보살피며 무슨 일 있을라 쪽잠을 자던 거위 모습은 사람이라고 저 보다 더할까 싶도록 지극 정성이었고 행여 다른 철새들이 가까이 올라치면 꺼위꺼위 큰 소리로 호통치고 그래도 안 들으면 고개를 숙이고 목을 앞으로 쭉 빼고는 빠른 걸음으로 쫓아내는 모습에 오랜 날 어린이집을 운영했던 그때 함께했던 선생님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고는 했었다

새벽 호수공원을 찾을 때마다 꺼위꺼위 인사하며 주변을 깨우는 부지런했던 율동 호수공원의 터줏대감

어느 가을날 누군가 작은 그릇을 놓고 그곳에 몇 번인가 먹이를 주더니 며칠 후 터줏대감 모습이 사라지고는 작은 거위를 대신했나 며칠 두었더니 그마저도 다 가져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오늘

새벽 운동 길

갑자기 떠오른 터줏대감 거위

몇 번인가 내 글 속의 주인공이었는데

보고 싶다

누가 데려갔을까

설마? 아니ㅡㅡ

그래 잘 키우고 있겠지

누군가의 이기심이 호수를 쓸쓸하게 한다

호수를 자주 찾는 이들은 터줏대감 바라보며 인사하고 지나는 모습 자주 보았었는데

호수공원 꺼위꺼위 긴 목줄 올리고 반갑게 인사하던 터줏대감의 인사가 그리워지는 새벽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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