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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미잘 Oct 13. 2024

건너가는 일


도로를 건널 때는 아빠 손을 꼭 잡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혼자 뛰어가면 위험해. 초록불이 되면 아빠 손을 꼭 잡고 건너는 거야.

위험하다는 말이 귀에 꽂혔을까? 횡단보도 앞에만 서면 안아달라고 한다. 양팔을 높이 들고 안아줘! 하면 안아주지 않을 수 없다.


도로를 건너는 것은 위험한 일, 아빠의 품이 필요한 일.

일단 안고 나면 아이만 내 품을 느끼는 게 아니라 나도 아이의 품을 느낄 수 있다.


아이는 이제 제법 묵직하다. 말랑한 엉덩이와 허벅지살, 따뜻한 가슴이 닿는다. 통통한 뺨을 가진 사랑스러운 내 아이, 사랑하는 내 아이.


나는 종종 아무 이유도 없이 아이를 안고만 싶다. 체온을 느끼고 말랑한 살로 가득 차고 싶다. 아이에게 안기고 싶다.

나는 무엇을 건너고 있길래 자꾸 안기고 싶을까?


내가 건너가는 것은 위로가 필요한 일. 하얀 민들레 홀씨를 지나쳐 가는 일. 강물에 떠내려가는 일.


길을 걸어가는 것은 항상 무언가를 건너가고 있는 것이다. 건너온 길들은 더 이상 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건너가는 것은 기존에 서있던 장소를 잃어버리는 일이다.


맥주 한 캔에도 취하는 날이 있다.

청경채와 버섯의 익힘 정도가 완벽한 소고기 볶음을 밥과 함께 씹을 때마다 계속 잃고 있음에 우울한 날이 있다.


뭔가 기억하려던 것이 있었는데, 기억하고 싶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고,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고 나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내가 길을 건너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건너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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