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0
종합병원 중환자실 면회 시간은 15분이었다. 아침 정해진 시간에만 입장이 가능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아침, 저녁 두 번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른 아침, 혹시라도 늦어서 못 들어갈까 봐 노심초사하며 병원에 도착했다. 대기 의자엔 나뿐이었다. 30분은 일찍 온 탓이었다.
예정된 시간에 가까워지자 하나둘 보호자가 늘었다. 곧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나와 안내 사항을 전했다.
이중으로 된 문 하나를 지나 복장을 갖췄다. 마스크는 필수고 준비된 흰 보호복(신발 포함)을 입은 뒤 페이스 실드까지 썼다.
엄마는 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누워 있었다. 여기저기 복잡한 줄을 많이 단 채로.
물만 조금 넘겨도 구토하는 바람에 뭔가를 제대로 먹지 못해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눈 한 번 깜빡이는 것도 힘들어 보였지만 나를 알아봤다. 외할머니는 잘 있다고 말하는 순간 눈물이 터졌다. 나조차 당황스러운 울음이었다. 끅끅대는 나를 보면서도 엄마는 한마디 못 했다.
금방 페이스 실드에 습기가 차 엄마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잔뜩 뿌연 시야로 엄마에게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는 사이 점점 숨이 가빠져 왔다. 엄마 얼굴을 계속 보고 싶다는, 내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여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다리에 힘이 풀려 숙여지는 허리를 일으켰다. 고작 15분, 그보다 빨리 나가기 싫었다.
더는 견딜 수 없다고 느꼈을 때, 주위를 지나는 간호사에게 나가야 할 것 같다고 겨우 말했다. 엄마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밖으로 나오자마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간호사가 괜찮으냐 물으며 페이스 실드를 벗겨 주었다. 어찌어찌 보호복을 전부 벗고 대기 의자에 반쯤 누웠다. 숨을 급하게 몰아쉬니 간호사가 응급실로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진다고 대답했지만 여기 이렇게 둘 수 없다고 말했다. 그분에겐 나도 처치가 필요해 보였으리라. 그렇게 나는 휠체어에 탄 채로 응급실에 보내졌다.
혈압도 정상, 체온도 정상으로 나오자 의사와 간호사는 일시적인 반응이라는 걸 알았는지 침대에 누워 있다가 괜찮아지면 일어나라고 했다.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있으니 초등학생 때, 생애 처음으로 응급실에 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말, 단짝과 영화를 보러 나왔던 날이었다. 상영까지 시간이 좀 남아 극장 근처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그때도 나는 참다가 참다가 안 되겠다 싶었을 때 친구에게 몸이 안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는 내 얼굴이 백지장 같다고, 당장 바로 앞 병원 응급실에 가자고 손을 잡고 이끌었다.
흉부 엑스레이를 찍고 수액을 맞았다. 친구의 연락을 받은 엄마와 아빠가 찾아왔다. 나를 얼마나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던지. 아빠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종합 검진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여긴 순 돌팔이들뿐이지 않냐고 흥분했었다. 실은 그때 기분 좋았다. 행복했다. 엄마 아빠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게 확연히 느껴져서.
얼마간 누워 있던 나는 일어났다. 간호사에게 괜찮아졌음을 알리고 응급실을 나왔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 했다. 그건 내가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