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
항해사는 보통 6개월 동안 배를 타고, 한 달 반 정도의 휴가를 받는다.
휴가를 끝내고 다시 6개월의 승선 생활을 하러 돌아갈 때면 그제야 친구들이 묻는다. 배에서는 대체 뭘 하며 지내냐고. 배에도 일터가 있고, 체육관과 노래방 시설도 있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다. 자발적 감금상태인 배 안에서는 행동반경의 제약과 할 수 있는 활동의 한계 때문에 스트레스 해소법을 스스로 터득하지 못하면 생활이 아주 힘들어질 수도 있다.
시간 때우기 1순위는 역시 TV 시청이다.
배는 한 달을 주기로 한국으로 들어가는데, 그때마다 부산에서 대용량 외장하드를 받는다. 그 안에는 영화, 드라마, 시사 프로그램, 뉴스, 오락 프로그램 등이 한 가득 들어 있다. 이 선물꾸러미를 받고 나면 한동안은 일과 이후 시간이 조용하다.
배 안에는 네트워크가 공유되어 있어 한 군데에만 설치해놓으면 개인 침실에서도 볼 수 있다. 이미 한 달이 지난 프로그램이지만 선원들의 즐거움은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의 잔상으로 현재를 소비하면서 잠깐 동안 내가 무엇을 하러 여기까지 왔는지 회의감에 빠졌던 때도 있었다. 방에만 들어가면 늘어져 하는 일이라곤 TV를 켜는 일이었으니….
배에서는 통신이 자유롭지 않다. 인터넷이 안 되면 지금 이 순간 한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배의 시간은 그래서 때때로 일시 정지 된다. 항해를 하다 보면 바위섬 하나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속에 갇힐 때가 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세계로 들어선 것처럼 이정표 없는 사막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가 엄마다.
생각해보면 내 나이 스물일곱. 함께 승선한 선원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고, 나이 차도 많이 나다 보니 간혹 물밀듯 차오르는 외로움은 양팔을 둘러 스스로를 껴안아주며 버텨내야 한다. 어리다고, 여자라고 도움을 바랄 수 있는 환경도 아니거니와 이곳에선 자신의 몸 하나는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한다.
한 번 바다에 나가면 6개월간은 꼼짝없이 배에 묶인다.
‘나는 강해졌을까?’
‘나는 강해지고 있는 걸까?’
나에게 끊임없이 묻고 또 묻는다. 두려운 만큼, 외로운 만큼 잘 견뎌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육지를 떠나 있으면 소중한 것에 대한 의미가 새로워진다.
사회적 배경, 재력, 남자, 스펙 따위는 아무짝에 쓸모없다.
가장 그리운 건, 땅이다.
그리고 그 땅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뿐이다. 당장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이란 게.
가끔 철저히 혼자가 되어보면 바로 그때 신은 나에게 진정 소중한 것들을 보여준다. 밖으로 빼앗길 시선마저 차단되면 그제야 내가 진정 원하고 바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너무 작아서 TV 소음에도 쉽게 묻혀버린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바깥의 소리를 줄이고 나를 낮춰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들린다. 눈을 감고 소리를 쫓았다. 어둠 속에서 소리가 그려낸 영상이 하나하나 빈방을 채워갔다. 가족들과, 엄마가 끓여준 찌개를 떠올리는데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이 말한다. 너에게 소중한 것은 엄마가 지어준 저녁 밥,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라고. 지금 너에게 들리고 보이는 바로 그것뿐이라고.
내 방엔 작고 여린 전등이 하나 있다. 방안을 비추는 것은 작은 불빛 하나면 충분하다. 이걸 보면서 행복하기 위해 온통 밝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 불빛 하나가 바다에 작은 표식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잠이 든다.
목적을 잊지 않도록, 시간에 휘둘리지 않도록, 내가 나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