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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와 횟집 수조와 조금 우울한 삶

우울과 함께할 수밖에 없는 삶도 있다.

by SEAN


내가 자주 지나다니는 길에는 큰 횟집이 하나 있다. 횟집이 으레 그렇듯 가게 앞에는 생선들을 넣어놓은 수조가 있는데 어느 날 그 앞을 지나가다가 방어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좁은 수조 안에 불편하게 떠 있는 방어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그 방어를 보며 사람들이 하는 생각은 가지각색일 것이다. “벌써 방어 철인가? 방어 맛있는데. 회 먹고 싶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저렇게 좁은데 두면 얼마나 버티나. 죽으면 상품 가치가 떨어질 텐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저 방어를 바다에서 어떻게 산채로 여기까지 가져오는 걸까. 신기하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방어를 보며 “방어라는 생명체는 바다에서 잡혀서 사람의 식탁에 신선하게 올라가기 위해 산채로 여기까지 끌려와 저 좁은 수조 안에 갇혀있는 거구나. 이게 과연 정당한 일일까.”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사람에겐 각자의 가치관이 있고, 살아가는 방식이 있다. 무엇이 절대적으로 옳다, 그르다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울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계속해서 부조리한 일들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 시스템 안에서는 필연적으로 강자와 약자가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약자들이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희생되는 일이 생겨도 “참 유감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라는 식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그런 부당함들을 지켜보다 보면 무력감과 우울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 무력감이 싫어 뭐라도 해보려 나서봐도 오히려 욕을 먹는 경우도 많다. “괜히 착한 척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 귀찮은 일 만들지 마.” 사회는 외면하면서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외면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만든다.


나라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싶어서 생각하는 건 아니다. 세상엔 타인의 입장을 읽어내고, 거기에 쉽게 몰입하는 시스템이 설치되며 자라난 사람들이 있다. 성인이 되어버리면 이런 기질들은 조절이 가능할 뿐 뿌리까지 뜯어고칠 수는 없다. 안 그래야지 하고 결심한다고 변하는 문제가 아니다. 방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가 원하지 않아도 이미 머릿속에서는 방어의 삶이 그려졌는데 그 삶을 앞에 두고 슬퍼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거다.

어렸을 땐 우울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슬퍼하지 않는 게 강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타인을, 심지어 나 자신조차 철저히 외면하는 버릇을 들였었다. 하지만 내 기질이 싫어서 나로 살지 않으려고 노력해봤자 결국 되돌아오는 건 허무함과 외로움뿐이었다. 이제는 슬픔을 담담히 견디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이라도 해나갈 수 있도록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강해지는 방법이라는 걸 안다. 병적인 증세로 넘어가는 수준이 아닌 우울은 감정일 뿐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타인의 불행에 우울해하고 슬퍼해야 세상이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우울을 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도 내 삶엔 계속 우울이 함께 할 테지만, 우울에 잠식되지 않고, 우울이 분노가 되지 않도록 나를 다스리며 현명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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