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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과 보상에 취한 빌런에 대하여

by 조직실험실

회사생활이 닳고 닳아 이제 웬만한 빌런쯤은

웃어 넘길만큼 내공이 쌓였다 싶을 때, 나는 M을 만났다. M은 신종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사람 스트레스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싫은 쪽으로 에너지를 쏟은 것도 오랜만이라, 최신 기억 속 가장 강렬한 빌런으로 각인되어 있다.


멀리서 본 M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자기 일에 진심을 쏟을 줄 알았고, 주변인들에게 상냥하고 친절했다. 느슨한 협업 관계로 만났을 때는 이것 저것 솔선하는 모습에서, 그를 유능한 인재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서사가 그 쯤에서 마무리되었다면 순도 100%의 해피 엔딩이었을 것이다. 그를 꽤 멋진 동료로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M이 팀을 옮겨와 가까운 동료가 된 순간 지옥이 시작되었다. 좋은 동료에서 최악의 과장형 빌런이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M은 고개를 늘 흔들면서 이야기한다.

두상을 이리저리 굴려야 더 깊은 고찰이 나온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회의실에 앉아 있으면 그의 안경이 시소를 타듯 진자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휴게실에서 잠깐 서서 이야기를 나눌 때는 정확히 5초에 한 번씩 짝다리 중심축을 바꿨다. 여러모로 M의 척추가 참 유연하다고 생각했고, 달팽이관이 유난히 예민한 나는 M을 마주할 때마다 멀미가 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늘 진지했다. 가벼운 사담을 나눌 때 조차 표정은 심각했고, 뭐가 늘 고민이라고 했다. M의 캐릭터가 완전히 파악되지 않았을 때는 그의 낚시질에 여러 차례 걸려들었다. 팀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얼굴로 고민이 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도리가 있나. 후미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무슨 일이에요? 나 들을 준비가 되었어요" 모드로 전환했을 때, 정작 M에게서 튀어나오는 건 욕조 물에 소금 한 티스푼 타다 만 밍밍한 주제였다. 싱겁다 못해 비릿한 물맛이 받쳤다. 그래도 큰 일 아니라 다행이다 싶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M은 요즘 말로 ‘진지충’이었다.


M의 진지력은 업무에서 극대화됐다. 모든 일에는 귀천이 없다 하지만, 팀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업무의 경중과 우선순위가 나뉜다.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빛을 보기 어려운 일도 있다. M이 맡은 것도 그런 일이었다. 비교적 가볍게 들고 천천히 걸으면 되는, 소위 ‘수명 업무’였다. 다른 나쁜 의도가 있지는 않았다. 부서를 막 이동해온 사람들에게 맡겨볼 수 있는 상식선의 배분이었다. 그 때는 미처 몰랐다. M의 진지력이 팀의 수명 업무를 어떻게 우주 최강 업무로 뻥튀기 시킬지를.


분명히 M이 가져간 업무는 붕어빵이었다.

옆 부서의 핵심 인재가 이 일을 가져갔다 해도, 할 수 있는 고민은 밀가루 반죽 색을 바꿔볼까, 앙꼬를 팥 대신 다른 걸 넣어볼까 정도였다. 붕어빵은 붕어빵이어야 했다. 애초에 붕어빵으로 기대하고 맡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M은 이 붕어빵에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씌우고 말았다. 아무도 예상 못했다. M의 손에 들어간 붕어빵은 어느새 팀에서 제일 중요한 자연산 도미로 탈바꿈하기 위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는 회의 시간에 매번 M에게서 ‘이게 왜 자연산 도미여야 하는지’ 설명을 들어야 했다. 지난했다. 나 뿐 아니라 모두가 설득했다. 붕어빵은 붕어빵이어야 한다고. 그래야 붕어빵이라고. 왜 지금 회의 시간에 붕어빵 타령을 해야 하는지부터 어리둥절했지만, 팀은 M을 환영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이야기했다. 친절한 M은 열심히 메모했다. 자유자재로 흔들리는 그의 고갯짓 속에 수긍의 끄덕임을 확인했다 생각하며 안도했다. 그리고 M은 다음 회의 시간에도 또 다시 일그러진 자연산 도미 그림을 가져왔다.


M을 설득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팀장의 설득도, 상무의 설득도 그는 거부했다. 처음엔 거부하는지도 몰랐다. M은 친절했고 상냥했고, 늘 고개를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으니까. 그리고 M은 돌아서서 꿋꿋하게 도미의 꿈을 향해 나아갔다. 못 알아듣는 바보인가 얼마간 진지하게 의심했다. 몇 번의 개인적인 대화 끝에 M이 못알아 들은 것은 아닌 것으로 확인했다. 확인하고 나니 더 화가 났다. 연차도 연차대로 먹은 사람이, 팀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왜 저럴까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아가 아무리 비대한 캐릭터여도 적어도 첫 한 해 정도는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굴러들어온 돌 다운 겸손 시늉이라도 장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노비가 그렇게 말을 안 X들을 거면 나가서 네가 사장해라." 화를 내고 싶었다.


그가 꾼 자연산 도미의 꿈이

팀 전체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틀 안에 누워있어야 할 붕어빵에 아가미를 그리고, 비늘을 붙이고, 바닷물까지 동원하려 하다 보니 팀의 인턴들 시간까지 모두 잡아먹었다. 요란하고 과장되게 일했다. 옆에서 계속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이미 결정된 사안들에 대해 계속 도돌이표 고민을 고백했다. 요란했지만 앞으로 시원하게 쭉 나아가지도 못했다. 정작 팀에서 제일 중요한 핵심 프로젝트 회의 시간이 붕어빵 데코 작업에 의해 밀리는 일도 발생했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눈 앞에서 펼쳐졌다.


왜 그는 붕어빵에서 도미의 꿈을 꾸었을까

M을 이해할 수 없는 만큼 다 유심히 M을 지켜봤다. M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에서 M은 자리에 오래 앉아있는 법이 없었다. 에너지가 좋아 몸을 흔들며 여기 저기 힘차게 다닌다. 자세히 보니 M은 조그만한 실무에 점 하나를 찍으면, 팀장에게 점 하나를 찍었다고 가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왜 이 점을 여기에 찍었는지, 이 점이 무슨 의미인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바쁜 팀장의 눈동자 시간에 흐려지고, 미간에 내천이 흐르기 시작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M은 보상에 집착했다. 말로는 "저는 평가 잘 받는거 원하지 않아요. 전혀 상관없어요." 하지만, 진짜 상관 없는 사람은 애초에 이런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을 터. 오히려 좋은 평가를 그 누구보다 갈망하고 있다는 해석이 더 정확했다. M은 회사 차원에서 결정되는 성과급 지급률, 연봉 인상률 소식에 굉장히 기민하고 예민하게 반응했다. 남의 회사에서 성과급 잔치를 했다는 뉴스만 들어도 발작 수준으로 편도체를 과용했다. 회사 포탈의 후미진 게시판 어느 곳에 올라오는 노조 협상안을 365일 매일 출석해 들어가보는 M의 성실함이 감탄스러웠다.

M의 마음 속에는

‘나의 일이 가볍게 보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마음’이 있는 듯 했다. 점 하나에도 반드시 의미를 부여해야 하고, 의미를 증명해야 한다. 그것이 있어야만 자기 존재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믿는 듯하다. 소위 ‘자기중심적 과잉 동일시(Egocentric Over-identification)’ 즉, 일이 곧 나 자신인 것이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M은 늘 근면했고, 일에 진심이었고, 일과 본인이 분리되지 못하는 딜레마에 쉽게 빠졌다. 그렇게 그는 붕어빵에 아가미를 달아버렸다.


또한 M은 외재적 동기(extrinsic motivation)가 강하게 작동하는 유형이었다. 성취 자체보다는 그것이 가져올 인정, 보상, 금전이 더 큰 에너지원이었다. 작은 붕어빵 업무는 곧 “보상도 작겠다”라는 불안으로 직결되었다. 그래서 그는 업무를 부풀려 도미급으로 만들어야만 스스로의 몸값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이는 ‘억눌린 불안의 과장’이고, 열등감을 상쇄하기 위한 과도한 자존감의 포장이다. 간단히 말해, M은 붕어빵에서 도미를 본 게 아니라, 도미에서 상여금이 헤엄쳐 오는 환영을 본 것이다.


진지함과 근면함은 회사생활에서 엄청난 미덕이다. 하지만 미덕의 수준을 넘어 신화 창조 단계 이르러 버린 M의 진지함은 주변인들을 결국 질리게 만들었다.


그에게 공감 표현을 해봤다

나태한 것도 아니고 맡은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겠다는데 돌 던질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충분히 무해하고 청정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아, 그러면 팀장님도, 상무님도 M님을 엄청 든든해하시겠네요. 열심히 해보세요. 응원할게요."

"아니에요 M님 잘못이 아니에요. 붕어빵이 도미가 되면 우리 팀도 좋은 일이죠."


안타깝게도 나의 공감은 M의 에고를 더 거대하게 키우는데 일조를 해버렸다. 자신의 진정성을 알아봐주는 사람이라며 끊임없이 끌려가 고민상담 시달림을 당했다.


약간 나무라도 봤다.

점 하나 찍고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좀처럼 상사의 가이드를 수용하지 않는 아집은 본인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사람들이 M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 번은 유사 뉘앙스로 M을 달래보았다.

그러나 자아가 긁힌 M은 이를 아예 부정했다. 억울하다고도 했다.

"팀장님이 저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저만큼 팀장님 위하는 사람도 없어요."

"..."


돌고 돌아 M과 한 일은 기준 벽 세우기였다.

“응 이건 붕어빵임. 도미 아님.”

M과 함께라면 이 진실을 머릿속에 네온사인으로 켜두어야 한다. 설득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 설득은 그를 더 신나게 만들 뿐이다. 아이러니하게 이 지점에서 도움이 되었던 것은 인지적 디퓨전(Cognitive Defusion)이었다. “아, 저건 M의 생각일 뿐이야” 하고 분리해 바라보는 기술이다. 그가 아무리 흔들고 떠들어도, 그건 그의 파도일 뿐 내 배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물리적인 거리 두기. 그와의 회의는 늘 시간을 짧게 끊었고, 대화도 간결하게, 사적인 식사 약속은 피했다. 그의 보상 욕망을 굳이 비난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 욕망에 내가 질질 끌려 들어가지 않도록, 정신적 방파제만 세워두면 된다.


조직에서는 이런 M을 단순히 ‘과장형 빌런’으로 치부해버리면 아깝다.

왜냐면 그 안에는 “내 가치를 증명하고 싶다”는 강한 동력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잘 이용하면 우주에서 별도 따올 수 있는 근면한 직원이다.

첫째, 업무의 경중과 우선순위 구조화가 필요하다. 아무리 포장해도 붕어빵은 도미가 될 수 없다는 기준을 분명히 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M은 작은 과제를 대서사시로 만들어 모두를 지치게 만든다.

둘째, 보상 체계의 정교화가 필요하다.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이 더 인정받는 구조’가 되면, M은 계속 도미의 환영을 만들어낼 것이다. 대신 성과와 가치 창출이 객관적으로 평가되고, 과장보다 실질적 기여가 보상받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셋째, 적재적소 배치다. M의 과장 본능과 보상 집착은 위험하지만 동시에 추진력이 크다. 신사업, 외부 파트너십 구축처럼 과장도 어느 정도 필요하고, 인정 욕구가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영역에 두면 그 에너지가 오히려 혁신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역량 검증은 필수이겠다.


M은 결국 붕어빵에서 도미를 보았다. 그리고 그 도미의 꿈은 팀 전체를 잠 못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심리를 뜯어보면, '존재 가치를 보상으로 환산하려는 욕망의 비틀린 변주’였다. 조직이 그 욕망을 제대로 다루면 혁신으로, 잘못 다루면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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