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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지심으로 무장한 상사를 만나면

by 조직실험실

상사 H와 함께 미국 출장 중이었다.

사내 임원 40여 명을 모시고 대규모 컨퍼런스에 참여하는 중요한 행사였고, 몇 차례의 답사와 준비 과정을 거치면서 긴장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행사 당일, 임원들이 타고 있던 차량 안에서 프로젝트 총괄이던 상사 H는 마이크를 잡고 곧 컨퍼런스장에서 우리 회사만을 위해 참석해준 클라이언트이자 연사를 소개하고 있었다.


“오늘 모시게 될 연사는 Mr. Wang입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연사의 이름은 Mr. Chen이었다. 혹시나 연회장에서 연사 앞에서 실수를 반복할까 걱정이 되어 자리로 돌아온 H의 귀에 나즈막히 조심스레 말했다.


“차장님, Wang이 아니라 Chen...입니다.”
“아차차, 내가 그랬나? 아… 근데 너 지금 그걸로 나 지적하는 거야? 건방지게?”


H의 눈빛이 갑자기 서늘해지며 말을 되받아쳤고, 어느 순간 나는 선을 한참 넘은 되바라진 부하직원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도착한 연회장에서 H는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연사 본인 앞에서 버젓이 “Mr. Wang”이라 그를 소개해버린 것이다. 그 순간 땅이 꺼지듯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정작 H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직 차 안에서의 나의 건방짐이 용서가 되지 않았던 H는 여전히 나에게 삐죽하고 싸늘할 뿐이었다.


H는 늘 허점투성이였다
손이 느리고 생각도 더뎌 구멍이 많았다. H손을 거친 기획서는 논점도 구획도 없이 공허한 텍스트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어 있었다. 부하 직원들은 H의 뒤에서 새는 구멍들을 틀어막고, 흘러서 빠져나오는 업무들을 주워서 수습해야 했다. 주니어 깜냥으로 막기 힘든 구멍들은 그대로 줄줄 새어나가 패키지로 호되게 혼구녕이 났다. 그런데도 H에게 피드백을 건네는 건 금기였다. 조금이라도 "차장님, 그런데..."의 뉘앙스를 풍기면 어김없이 골방으로 불려갔고, 그곳에서 나누어야 할 대화 패턴은 늘 같은 레퍼토리였다.


“자격지심일 수 있지만, 내가 한마디 해야겠어.”


그 말의 진짜 의미는 항상 “너 때문에 기분 나빴다.”는 감정 폭격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늘 온몸에 명품을 두른 채 출근했다.

번쩍거리는 벨트, 명품 옷과 구두, 손목에 찬 수천만원짜리 시계를 차고 다녔다. 사석에서는 빠짐없이 집과 차에 대한 자랑이 이어졌다. “우리 집은…”, “내 차는…”으로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는 스스로를 럭셔리 카테고리에 최선을 다해 소속시키려 했다. 정작 업무 카테고리에서 H는 늘 뭐 하나 제대로된 천 쪼가리 하나 없는 남루한 빈티지를 대표했기에, 그의 비주얼은 아이러니하게 더욱 돋보였다.



결국 나를 포함해 H 밑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하나 둘 회사를 떠났다.

H의 삐침을 감당하기 힘들어서도 있었지만, H 같은 캐릭터가 버젓이 그 조직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과, 보고 배울 상사가 없다는 씁슬함과 공허함이 퇴사의 이유가 되었다. 시간이 흐른 뒤 몇 남지 않은 동기들로부터 H가 조직개편의 바람 속에서 결국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한직으로 밀려났다 소식이 들려왔다. 업무적 무능에 더해진 H의 자격지심과 방어적 태도는 결국 H 자신조차 지켜주지 못했다.


H를 돌이켜보면 두 가지 심리가 예측 된다.

첫째는 자존감의 결핍이다. 그는 작은 피드백조차도 존재 전체를 부정하는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동료가 건넨 조언은 곧 “네가 부족하다”라는 낙인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래서 배움과 성장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타인의 말 속에 숨어 있던 개선의 기회를 보지 못하고, 대신 자기 방어를 위해 상대를 몰아붙였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그에게는 거대한 위협처럼 다가왔고, 그 불안을 잠재우는 방식은 결국 공격뿐이었다.

둘째는 과도한 보상심리다. 그는 내부의 불안을 직시하지 못한 채, 외부의 장식으로 스스로를 덧칠하려 했다. 반짝이는 벨트, 큼지막한 로고가 박힌 셔츠, 과시적인 시계와 같은 명품은 단순한 소비가 아니라 자기 확신을 위한 갑옷이었다. 그러나 그 갑옷은 얇고 불완전한 방패에 불과했다. 불안을 가리는 대신, 오히려 그 속의 불안과 자격지심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겉은 화려했으나 속은 불안정했고, 그 불일치가 그의 언행 곳곳에서 삐걱거림으로 드러났다.


시간이 흘러도 H의 언행이 상사로서 적절치 않았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H의 연차 그 이상을 살아내고 돌아보니, 그에 대한 깊은 연민의 감정이 더 크게 자리 잡는다. 새파랗게 젊은 후배 앞에서 자격지심을 게워내기까지 그의 내면에는 얼마나 큰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 연차가 쌓일수록 회사에서의 한 해 한 해가 무겁게 다가오고, 미래는 보장되지 않은 채 후배들은 치고 올라온다. 멀쩡한 사람들도 조직개편의 작은 바람에도 마음이 서늘해지는게 고연차의 숙명이다.

스스로도 성과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H는 늘 긴장과 불안 속에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명품 갑옷은 애처로운 방어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H의 자격지심은 쓸쓸함이었다.


연민과는 별개로, 조직이 배워야 할 교훈은 비교적 단호하다.

당시 회사에서 H에게 강한 시그널과 피드백을 조금 더 직접적이고 빠르게 주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자존감이 취약한 리더는 자신을 지키려는 방어로 팀 전체를 소모시킨다. 직원들의 입을 막고, 실수를 학습으로 전환할 기회를 없애며, 결국 조직의 창의성과 성과를 고갈시킨다. 무엇보다 심리적 안전감이 사라진 공간에서 구성원들은 버티지 못한다.

조직이 리더를 선발할 때 직급이나 연차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또 다른 H가 탄생할 것이다. 정서적 성숙도,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태도, 구성원을 존중하는 관계 맺음의 방식이 리더 선발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팀은 침묵하고, 인재는 떠나고, 조직은 성장의 동력을 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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