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무실 투머치토커의 최후

by 조직실험실

H의 모든 말과 글은 어순과 어법이 맞지 않는다.

그가 하는 말은 주술목이 뒤엉켜 있어, 그가 살고있는 세계는 대–한–민–국이 아니라 대–국–한–민의 룰이 적용되는 세계인가 싶었다. 그래서 H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자리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손에 진땀이 나고, 때로는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H는 그의 언어를 듣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멀미가 나게 만드는 신묘한 재주가 있다.


H가 만들어 오는 기획안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어떻게 의사결정하겠다는 설득의 메시지는 전혀 수집이 되지 않았다. 주장도, 논리도, 맥락도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막 입사한 신입사원이 안타깝게도 이러했다면, 언젠가는 열정과 능력 있는 상사를 만나는 행운이 보우하사 희망을 걸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H가 연차가 꽉 찬 팀의 선임급이라는 점이 주변을 더 절망케 했다.


누군가의 밤잠을 설치게 하는 빌런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능력 문제에 더해 정규분포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태도 문제도 갖추고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H를 힘들어하는 킥 요소 중 하나는 그가 사회성이 결여된 ‘투머치토커’라는 점이었다. 그는 여자친구와 무엇을 했고, 여행 가서 무엇을 먹었고,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 등 입만 열면 안물안궁의 서사들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청자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날 것의 콘텐츠는 뒤엉킨 어법과 어순의 선율을 타고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가끔씩 H를 접하는 부서 외부 사람들은 ‘독특하다.’ 키득거리며 지나갔지만, 같은 부서 사람들은 H와의 대화를 피하고, 그와 협업하는 것을 유난히 힘들어했다.


인간적인 매력도, 업무적인 매력도 갖추지 못한 H가 조직에서 1인분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런 H와 짝을 이뤄 협업해야 하는 동료도, H를 성장시키고 관리해야 하는 리더도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H는 왜 투머치토커가 되었을까

증명할 길은 없으나 H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와 운동을 꽤 잘했고, ‘주목받는 아이’였다고 한다. (물론 이 점도 H의 투머치토크를 통해 수집된 정보이다.) 과거의 그 '괜찮았던' 경험이 오래 각인되어 있었던 탓일까. 관종이 되고 싶은 인간적 본성에 특정 개인의 고유성이 버무려져, H 특유의 관종력으로 진화되었다. 그래서 성인이 된 후에 그는 말을 많이 해야 본인 존재가 증명된다고 믿는 듯 했다. ‘자기애적 보상 행동(narcissistic compensation)’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불안할수록, 스스로의 위치가 불분명할수록 사람은 말을 늘린다. 침묵은 불안을 키우고, 말은 자신을 통제하고 있다는 착각을 준다. 그래서 H의 수다는 사실 불안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의 말은 자신을 지키는 방패였으나, 동시에 주변을 지치게 하는 폭력이었다.


그런 H와 함께 성과를 내려면 일종의 ‘H 사용법’이 필요했다.

H에게 구획화되어 있지 않은 기획성 업무는 재앙과 같았다. 논리 구조를 스스로 짜야 하는 일은 어김없이 늘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기성의 일을 다짐육처럼 잘게, 잘게, 잘게 쪼개서 부분 부분 정해진 트랙을 따라 빈칸을 채우는 방식으로 주면 달라졌다. 마치 암기 과목의 빈칸 채우기 시험을 보는 것 처럼.


그렇게 일을 주면 H는 꽤 책임감을 가지고 해냈다. 모호한 목표 대신, ‘여기까지는 네가 하고, 이건 하지 마’가 분명할 때 그는 제법 괜찮았다. 리더 입장에서는 피곤했지만, 이 방법을 알면 쓰임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H의 리더가 바뀌었다.
새로운 리더는 그 누구보다 ‘하세요, 하지 마세요’가 매우 매우 분명한 사람이었다. 새로운 리더십도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터였다. 단호박처럼 명확한 지시 속에서 H는 군기가 바짝 들었다. 놀라운 건 그 다음이었다.


그토록 사람을 지치게 하던 H가 자기 역할을 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회의 시간엔 군더더기 말을 대폭 줄일 줄알았고, 보고서에도 문장의 뼈대가 생겼다. 리더가 뒤에서 제대로 잡도리를 한 결과였지만, 산출물 관점에서 보면 그래도 정규분포 안에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H는 화가 날 정도로 멀쩡해졌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문제는 ‘H 개인’이 아니라, 그를 방치했던 ‘조직 환경’에 있었다는 것을. 명확한 경계와 단호한 피드백 속에서, H는 더 이상 빌런이 아니게 되었다.


빌런은 태어나는 게 아니라 길러진다

H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다. 그가 조직의 1인분이냐 묻는다면, H의 새 리더는 아마 크게 성을 낼지도 모른다. 그의 말투엔 여전히 습관적인 엉킨 서사가 묻어나고, 보고서 문장에는 논리의 비틀림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조직을 극도로 피로하게 만들지 않는다. 모두가 슈퍼스타가 될 수 없는 조직의 생리에서 H는 충분히 나쁘지 않은 조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바짝 군기가 든 채로.


결국 빌런은 타고나는 존재가 아니라, 구조 속에서 길러진다. 애매한 지시, 불분명한 역할, 책임이 흐릿한 시스템은 또 다른 H를 만든다. 빌런을 떠안게된 리더가 해야 할 일은 빌런을 탓하고 내치는 결정을 하기 전에, 그를 빌런으로 만들지 않는 환경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을 H의 사례를 통해 깊이 깨달았다.


조직은 여전히 수많은 H들을 품고 있다. 문제는, 그들 중 누구를 내일의 빌런으로 키워내고 있는가일 것이다.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5화나태지옥에 빠진 사무실 빌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