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직장 생활 통틀어 최악의 상사였던 A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사무실에서 만난 빌런들을 이해하고자 애쓰며 글을 쓰다보면, 글쓰기의 위력을 몸소 실감하곤 한다. 텍스트 정렬 어느 지점에선가부터 그들의 결핍과 불안이 느껴지면서 공감과 연민의 감정이 올라온다. 조직의 맥락 속에서 그들의 뒤틀린 행동에 어떤 메시지가 담겨있는지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디 선하고 악의가 없다는 철학의 본질에 다다를 수가 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감정의 질감이 조금 다르다. 어떠한 온기도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악질에 가까웠다.
상사 A는 모든 주니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무서워서 무섭다기보다, 더러워서 무서웠다.
그녀의 모든 피드백은 더러웠다.
A는 여직원들을 줄 세워 손톱 검사를 했다.
네일을 받아 정성스럽게 손질한 손톱일수록 더 크게 혼이 났다. “이렇게 손톱이 길고 화려하면 일을 어떻게 하냐”는 것이 질타의 명분이었다. HR 업무는 손톱으로 하는 것인가, 연구가 필요한 주제였다.
그녀의 눈에 거슬리는 것은 손톱 뿐이 아니었다. 무릎이 보이는 스커트, 체형이 드러나는 옷, 높은 구두, 메이크업까지. 멀쩡히 대학을 졸업하고 몇백 대 일 경쟁을 뚫고 입사한 젊은 직원들이, A로부터 여전히 70년대 여공 취급을 당했다. 자그마치 김연아 선수가 세계 무대를 빛내고 있던 2010년 언저리 대한민국의 어느 대기업에서 일어난 일들이었다.
업무 피드백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는 교육학 전공했다는 애가 이것도 모르냐?”
“심리학 전공했다면서 이건 할 줄 알아야지. 개념이 없네.”
아무런 시사점을 얻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대학 시절, 교육장 바닥에 멀티탭 줄을 발에 안 걸리게 테이프로 붙이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 큰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A는 늘 뚱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장악했다.
“군기와 기강이 필요하다”는 그녀의 철학은 견고했고, “정신 교육”이라는 명분의 공허한 질책이 온오프라인에서 쏟아졌다.
그녀는 부하 직원을 공기처럼 대했다. 자신의 자리로 불러내 업무 지시를 할 때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인격 모독성 발언을 쏟아냈다. 옆에 서서 고개를 푹 숙이고 폭언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부하 직원은 사무실 모든 이들로부터 연민의 시선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도망치듯 부서를 옮겨 떠났고, 누군가는 병을 얻어 휴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A와 면담이 있을 때마다 어떠한 일들을 대비해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기계적이고 사무적인 대응으로 접점을 최소화하려 애썼다.
그럼에도 A의 군림은 꽤 오랫동안 유지됐다.
왜일까.
그녀의 동년배들은 혀를 차며 A를 손절하고 피했지만, 위의 팀장과 임원은 대체적으로 알고도 묵인했다.
더한 상사는 손에 물 묻히지 않고 사무실 긴장을 유지하는 데 그녀의 캐릭터를 이용하기도 했다.
폭군은 이렇게 조직이 스스로 고용한 방패로 기능했다.
A는 HR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쪽 일을 너무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밑으로 흘러 내려오는 그녀의 피드백은 늘 ppt 기획안의 줄맞춤과 폰트, 맞춤법 교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상사 어른들의 평가가 어떻게 오갔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주니어 모두가 그녀의 무능을 눈치챌 수 밖에 없었다.
한편, 그 시기엔 유명 컨설팅펌 출신, 해외 MBA출신들이 잇달아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나 역시 그런 상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며 성장했다. 하지만 A에게 그 변화는 위협이었다.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음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했을 터.
무능한 사람이 권력을 쥐면, 통제는 기술이 아니라 생존이 된다.
그녀의 통제적 행동은 불안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존재감을 확인받기 위한 자기 방어였다. 그녀는 밀려나는 것이 두려웠고, 무시당하는 것이 죽음처럼 느껴졌으리라. 그래서 힘없는 사람들을 깎아내리고 모욕하며, 자신이 ‘아직 힘이 있다’는 착각 속에 안도했을지 모른다. 그렇게 A는 포지션 파워를 휘두르는 전형적인 리더십 디레일러로 스스로를 힘껏 포장하고 전시했다.
그 무렵 나 역시 여러 이유로 이직을 선택했다. 퇴사 당일,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의 모든 연락처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A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동일 업계에 있다는 사실마저 부정하겠다는 강한 결심이었다. 내 직업 인생에서 애초에 깨끗하게 없는 존재로 두고 싶었다.
그로부터 몇 해 뒤 들려온 A에 대한 소식은 놀랍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어느 깨어있는 임원의 눈밖에 나는 바람에 A 아래 두었던 주니어들이 먼저 구출되었고, A는 궁지에 몰리고 몰리다 결국 회사를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어느 영세 업체의 강사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 업체 홈페이지에서 그녀의 프로필을 확인했고, 나는 새로 자리잡은 회사에서 그 업체를 ‘믿거(믿고 거르는)’로 등록했다.
A는 분명 별로였다.
사회적이고 합리적인 범주에서 설명할 수 있는 인물의 범주는 아니었다. 소시오패스 그 어디쯤이었다. 그러나 더 별로였던 건, 그녀의 문법이 통용되도록 묵인했던 조직이었다. 문제 인물을 묵인하고, 사무실 기강을 잡는 데 오히려 그녀의 폭력성을 이용했다. 문제 인물을 ‘통제의 도구’로 쓰는 순간, 조직은 함께 곪고 병들기 시작한다.
조직은 A와 같은 빌런을 어떻게 다루는 것이 맞았을까. 관리자에 대한 360도 피드백, 정기적 리더십 리뷰, 심리적 안전망이 작동했더라면, A의 군림은 훨씬 일찍 끝났을 것이다.
사람은 왜 별로일까.
어쩌면, 그 별로를 필요로 한 조직이 진짜 별로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