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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anius Sep 04. 2024

유학 4년 만에 미국 문학 도장깨기.

Digging into American Literature.

 "대박! 나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들은 영어 교과서 찾았다."


미국으로 이민한 지 4년 차 되던 해에 나는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인 12학년이었다. 당시 나는 대학 입학원서를 막 쓰기 시작하는 중요하고 긴박한 시기에 호기롭게도 AP American Literature를 듣기로 결심했다. AP란 Advanced Placement라는 단어의 약자로 대학교 레벨의 수업으로 대학 입학 전 고등학교에서 해당 과목의 대학 점수를 미리 획득할 수 있는 수업이었다. 그만큼 더 어렵고 난이도가 있는 수업이다. 게다가 영어의 눈, 귀, 입이 막 트이는 무렵인 미국 갓 4년 차 유학생에게 그냥 문학도 아닌 AP 미국 문학이라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다. 적어도 항상 이과라고 생각하던 나에게는... (참고로 미국에는 이과 문과가 나뉘어 있지 않다.) 당시 LA 통합교육국 전체에서 하위 96% 이하를 달리고 있었던 우리 고등학교에서 AP 수업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 이 수업이 나에게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아래 교과서는 내가 당시 AP 미국 문학을 수강할 때 받은 책으로, 이 책에는 자신의 한계를 계속 시험하고 싶었던 일개 외국인 고등학생의 책에 대한 이해와 생각들로 빽빽하게 적혀있다. 이 교과서는 당시 영어 선생님이었던 Ms. Negrey가 선물로 주신 것이었다. 갑자기 이민 당시 나의 힘들었던 상황들과 그분의 배려가 생각이 나서 눈물이 핑 돌았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며 내가 남긴 annotation.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Los Angeles 국제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을 제자리로..."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 나에게 영어란 그저 내신 점수를 잘 받아야 하는 과목 중 하나였다. 영어를 배우면 좋다는 말은 정말 많이 들었지만 실직적인 그에 대한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중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나는 미국 LA행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영어를 학교 교과서로 배운 나로서는 미국 한가운데 떨어져서 오직 영어로만 모든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렇듯 비영어 국가에서 이민을 온 나로서는 English as Second Language (ESL)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ESL 수업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을 위한 영어 수업으로 기존 영어 수업보다 단계가 훨씬 낮은 수업이다. 한국에서 나름 영어 성적이 괜찮았던 나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배움에 있어서는 자존심 따윈 버려야 했다.


내가 거주했던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공립학교를 다니는 학생 모두가 매년 California State Standarized Tests (캘리포니아 주 표준시험)을 치워야 하는데 English Language Proficiency Assessments for California (ELPAC)라는 시험에서 표준 이상의 점수를 받으면 ESL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됐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미국에 온 지 1년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기에 1년을 더 Advanced레벨의 ESL 수업을 듣게 되었다. ESL 수업은 다른 수업들과 다르게 영어가 2시간이었다. 이 때문에 다른 수업 하나를 더 들을 수 없어서 다른 친구들보다 뒤처지는 느낌이었지만, 내가 다니던 학교는 year-round 제도를 가진 학교였기 때문에 방학 때 수업을 추가적으로 들을 수 있었고 추가로 두 개의 과목의 성적을 방학 때마다 보충하곤 했었다. 보통 방학 때 수업을 듣는 친구들은 대부분이 D나 F를 받아 점수를 보충하기 위함이었지만, ESL로 인해 뒤처진 나의 성적을 올리기 위함이었고 방학 때도 쉴틈이 없는 생활이었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다른 공립학교에 비해 학생이 많아서 이런 제도를 가져 일 년 내내 학교가 운영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호불호가 가려지는 학교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호였다.


그렇게 9학년까지 ESL 수업을 모두 듣고 그 해 여름방학 때 처음으로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이 듣는 영어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야말로 한국학교에서 비로소 국어 수업을 듣는 수준이었다. 보통 1학기가 3개월 정도였는데 그 보다 훨씬 짧은 방학 기간 동안 한 학기의 내용을 모두 끝내야 했기 때문에 보통 학기 중 듣는 영어보다 훨씬 어려웠다. 당시  수업은 Lord of the Flies(파리 대왕)라는 1954년에 발매된 소설이자 1983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Williams Golding의 작품을 읽고 내용을 수업시간에 토론하는 수업이었다. 이제 ESL 수업을 갓 마친 영어 신생아 이민자인 나에게 정말 어려웠지만 이 짧은 기간 동안 영어가 정말 많이 늘었고 책을 효율적으로 읽는 법도 익힌 것 같다. 그중 하나가 애노테이션(annotation)이었다. 이는 책을 읽으며 내 생각을 관련 텍스트 위에 노트하는 것으로 흘려서 빠르게 읽는 것이 아니라 집중하여 읽는 방법이다. 이 방법에 숙련되면 글을 이해하고 문제 푸는 훈련이 되어서 미국 대학 입시시험인 SAT (Scholastic Assessment Test)에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책을 펼쳤을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어서 추억팔이에도 좋다.   


당시 우리 고등학교를 포함한 미국 국립 고등학교에서는 보통 교과서도 해당 과목 선생님께서 빌려서 교실에서만 읽을 수 있도록 비치해 두었었다. 그래서 교과서 용도로 빌린 책에 애노테이션을 하는 것은 불가했었고 나는 항상 나의 개인 책을 구매하여 낙서하듯 책에 나의 생각들과 내용을 애노테이션 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방법이 큰 부담이 없었던 것이 미국의 소설이나 책들은 보통 비용 절감을 위해 지금도 저렴한 펄프지를 사용하여 출판된다. 그래서 당시 5-6천 원 정도의 돈으로 책을 한 권 구매할 수 있었다. 하지만 12학년이 되어 호기롭게 들은 AP 미국 문학은 이름처럼 교과서도 fancy 했다. 하드커버로 되어있었으며 종이재질도 매끈한 하얀 종이였으며 책 자체도 두꺼워서 가격도 상당히 비쌌었고 당시 SAT시험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공부했던 나로서는 이 책을 구매할 여유가 되지 않았다.


당시 영어 선생님이셨던 Ms. Negrey는 러시아권 분이셨고 인상도 러시아 기후만큼이나 굉장히 차가웠었다. 선생님  역시 해당 교과서를 여러 권을 학교에서 빌려서 교실에 비치해 두었었는데, 한 번은 항상 수업시간이 모자라 방과 후에도 끝까지 남아서 책을 보며 공책에 뭔가 열심히 적는 나를 보고 물어보셨다.


"Sea, what are you writing?" (뭘 적고 있니?)

"I'm annotating on my notebook because I can't do that on the textbook." (공책에 제 생각이랑 내용을 적고 있었었요. 교과서에 적을 순 없잖아요.)

"Oh yeah. Annotation really helps, huh? Kids don't do that these days, though" (오 맞아. 애노테이션이 도움이 되지? 요즘 애들은 그걸 안 한 단말이지.)

"Yes. And thank you, Ms. Negrey, for staying late with me. (맞아요. 그리고 저랑 늦게까지 계셔주셔서 감사해요.)

"No worries. I'm also working on something. And you can keep that book. It's yours now." (걱정하지 마렴. 나도 일하는 중이거든. 그리고 그 책 이제 네 것이니 가져가도 좋아.)


쿨하게 무표정으로 말씀하셨지만 따듯함이 묻어났다. 아직 대학 레벨의 영어 수업이 벅차서 수업시간이 모자라 방과 후에도 남아 책을 보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나에게 자유롭게 필기하며 집에서도 독서하라고 빌려주셨고, 선생님이 사비로 구매하여 나에게 주신 것이다. 아직도 이 책 맨 앞장에 Ms. Negrey가 이 책을 학교에서 빌렸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내가 미국 유학 4년 만에 대학교 과정의 영어 수업을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나의 노력도 있었지만, 더불어 말투는 차갑지만 누구보다 자신의 학생에 대한 따듯한 마음을 가진 훌륭한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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